대담

보이지 않는 세계의 탐구자들

김 성 희   동 양 화 과 교 수 &
고 희 정   언 어 학 과 교 수

수천 개의 언어에서 보편 구조를 찾는 언어학과 고희정 교수와 선과 여백으로 현상 너머 이면의 작용까지 표현하는 동양화과 김성희 교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해 온 두 사람은 원칙과 규칙을 조합하고 뛰어넘는 과정에서 ‘무한한 상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뿌리를 공유하는 언어와 이미지

언어 데이터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문법 체계를 표상하고, 이미지는 감각 너머에 숨겨진 조형 원리를 드러낸다. 인문학적 탐구와 예술적 직관은 이렇게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Q언어학과 동양화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까요?
A

김성희 교수개별성 너머에 있는 구조와 원리를 찾아간다는 점, 아닐까요? 예를 들어, 캠퍼스에서는 꽃이 피었다 지고 건물이 생겼다 사라집니다. 이렇게 순간순간마다 나타나는 변화를 마주할 때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요. 여기서 보이는 현상과 그 이면의 작용에 대한 질문은 제 작업의 출발점이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조형 언어입니다.

고희정 교수동의합니다. 수천 가지 언어를 분석하다 보면 겉으로 드러난 복잡함 뒤에 단단한 원리가 있거든요. 언어표현은 사고의 일부분만 담아내지만, 언어학은 그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적 사고체계까지 모델링해야 하고요. 각각의 상황을 마주하며 보이지 않는 본질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언어학과 동양화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Q두 분의 학문적·예술적 출발점이 궁금합니다.
A

고희정 교수저는 학부 시절부터 어학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는데, 포인트는 남들과 달랐습니다. ‘말을 잘하고 싶다’라는 생각보다 ‘왜 이런 표현을 쓸까’, ‘문법은 왜 이렇게 구성되어 있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생겼거든요. 그렇게 계속 물으며 답을 찾다 보니 어느 순간 언어학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김성희 교수저에게는 2005년이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대나무를 주제로 ‘마디의 시작은 어디이고 끝은 어디인가, 경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작업했는데요. 2005년 뜻밖의 사고로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꼬박 누워있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바깥으로 원망을 돌렸는데 갑자기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수없이 많은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은 지향성 혹은 방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때부터 별자리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창작은 생각에 따라 즐거운
놀이가 되기도, 괴로운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내가 이 세계 속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느끼는 것이에요.
그때 비로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진짜
상상이 시작됩니다. 김성희 동양화과 교수

선으로 잇고 선을 넘으며

직선은 단어 사이에 질서를 부여하고 고립된 점들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었지만, 관성을 깨는 순간 더 놀라운 가능성이 펼쳐졌다. 정답의 굴레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다.

Q별자리 연작과 통사론에서는 선으로 세계를 구조화한다고 들었습니다.
A

고희정 교수학생들에게 언어학을 설명할 때 화학의 주기율표와 비교해요. 세상의 수만 가지 물질을 몇 가지 원소 조합으로 설명하듯, 언어 역시 명사나 동사 같은 요소와 이들을 연결하는 선들을 활용해 구조화할 수 있거든요. 제 연구노트에 선들이 가득한 이유죠. 주어와 동사를 선으로 엮어 하나의 관계를 만들고, 거기에 또 다른 선을 붙여 나가는 과정이 제 연구에서는 일상입니다.

김성희 교수정말 닮은 점이 많네요. 별자리도 점 두 개와 선 하나만 있으면 만들어지니까요. 점은 스스로 방향을 가지지 못해 아무리 찍어도 평면이나 입방체에 머물지만, 선은 유일하게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별자리는 결국 방향성을 가진 선들의 총합인 셈이죠. 인류가 오랜 시간 꿈꾸고 지향해온 욕망의 방향들이 하늘에 투사된 것이 바로 별자리입니다.

고희정 교수현대 언어학에서 언어를 설명하는 원칙 중 하나도 병합(Merge)입니다. 절제된 몇 가지 요소를 선을 통해 조합하여 위계를 가진 무한한 문장을 만들어내고 인간의 사유를 표현해요. 그런 면에서 언어의 구조를 그리는 일은 김성희 교수님께서 별자리를 그리시는 과정과 다르지 않겠네요.

Q두 분 모두 ‘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순간도 있으시다고요.
A

김성희 교수20년 넘게 별자리 작업을 하면서 별과 별을 직선으로 이어왔습니다. 빛은 최단 거리로 간다는 물리적 법칙에 갇혀 있었던 거죠. 그러다 문득 ‘왜 꼭 직선이어야 하지?’라는 의문이 생겨 직선을 버렸는데요. 화면 위에 빛나는 미소가 나타나더군요. 옳다고 믿었던 틀을 깨는 순간 자유를 얻게 된 셈이죠.

고희정 교수언어학의 트리 구조 역시 비슷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직선 트리만 그렸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모빌처럼 돌아가는 3차원 트리를 그리고, 휘어지는 선들로 연결합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어떤 언어 현상은 휘어진 선으로 연결해야만 이해할 수 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직선의 관행을 깨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는 게 오히려 놀랍습니다.

여백과 모호함을 견디며 만드는 나만의 질문

단어 사이의 함축은 행간의 의미를 추론하게 만들고 화폭 속 여백은 형상 너머를 가늠하게 한다. 이 모호함과 여백을 견디는 힘을 뚫고 나갈 때 자신만의 질문과 답을 찾을 수 있다.

Q여백과 함축이 AI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까요?
A

김성희 교수비워둔다는 점에서 여백은 굉장한 개념입니다. 작가 마음속에 여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죠. 꼭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바쁘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존재의 틈’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숨을 쉬게 하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게 하는 공간이니까요.

고희정 교수언어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상호작용하며 주고받는 정보가 말보다 훨씬 중요할 때가 많거든요. 예를 들어 “연극 재미있었어?”라는 질문에 “배우들은 좋았어” 라고 답하면, 청자는 말해지지 않은 부분, 즉 ‘배우들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의미를 자연스럽게 추론하게 됩니다. 표현된 문장을 넘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그 여백을 어떻게 채우는가에 따라 대화의 깊이가 달라지게 되지요.

김성희 교수정보를 뛰어넘는 부분, 정보가 없음으로써 오히려 정보를 극대화하는 여백의 가치는 AI 시대에 더 소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면의 관계를 확장하며 우리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돕기 때문입니다.

Q학생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A

김성희 교수별자리는 무거운 존재를 놀이의 단계로 끌어올린 인류의 창조적 결과물입니다. 무질서해 보이는 별들 사이를 잇는 과감한 시도의 산물이기도 하고요. 우리 학생들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돈키호테 같은 정신으로 일단 뛰어들었으면 좋겠어요. 무모하게 선을 잇다 보면 어느덧 자신만의 빛나는 별자리를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고희정 교수저는 질문에 머무르며 답을 바로 구하지 않는 인내심을 강조하고 싶어요. AI 등장과 함께 정답을 너무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잖아요. 하지만 정답 없는 모호한 상태를 견디는 과정이 있어야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 수 있어요. 기다림을 견디고 퍼즐이 맞춰지는 찰나의 즐거움을 꼭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정교한 언어체계
(Linguistic System)를 품고 태어납니다.
언어학은 그 설계도를 해독하며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죠.
하나의 문법적 원리를 깊이
파고들다 보면 언어의 특이성을 넘어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는
보편적 질서와 연결되는 경이로운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고희정 언어학과 교수

‘선과 여백으로 세계를 표현하는’ 혜명 김성희 교수는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별자리 연작을 통해 점과 선이 만드는 관계의 망과 지향성을 탐구해 왔다. 서울대학교미술관(SNU MoA) 관장과 관악학생생활관 관장, 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전통 기법에 현대적 조형 언어를 결합한 실험적인 작업을 지속하고 있으며, 2023년 영국 본햄스(Bonhams) 초청으로 런던 메이페어 본햄스 본사에서 한국 화가 최초의 개인전 ‘HEMYEONG’을 개최했다.

‘수천 가지 언어의 보편 원리를 찾는’ 고희정 교수는 인문대학 언어학과 교수로, 통사론과 언어습득 분야를 연구하고 가르쳐왔다. MIT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뉴욕주립대(SUNY) 스토니브룩 조교수를 거쳐 2007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부임했다.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보편 문법의 원리가 개별 언어의 어순과 구조를 어떻게 형성하는지 모델링하며, 이론언어학의 가설을 실험적 방법으로 검증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2014년 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저서 『Edges in Syntax』를 출간했으며, 학부대학 교육부학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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