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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정 한 조 경 · 지 역 시 스 템 공 학 부 교 수 &
홍 진 호 독 어 독 문 학 과 교 수
기술과 제도의 변화는 새로운 도구의 탄생을 넘어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흔든다.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배정한 교수와 독어독문학과 홍진호 교수가 도시와 삶의 구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깊이 연구하며 마주했던 질문들을 함께 짚었다.
배정한 교수와 홍진호 교수는 ‘전환’을 세계관과 질서의 재편으로 정의한다.
과학기술이 판단 기준과 태도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뜻이다.
홍진호 교수다양한 단어가 있지만 ‘세기 전환’과 관련해서는 ‘뒤집다’라는 뜻의 동사 벤덴(wenden)에서 온 벤데(wende)를 씁니다. 그래서 ‘전환기’는 시간을 뜻하는 차이트(zeit)와 벤데를 합쳐 차이트벤데(Zeitwende)라고 합니다. 단순히 시대가 교차하는 때가 아니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와 독일 통일처럼 세계관이나 사회 질서가 뿌리째 바뀔 때만 써요. 독일어에서는 그만큼 무거운 단어입니다.
배정한 교수조경과 도시설계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 도시에 공장이 생기면서 인구가 집중되었는데, 도로와 상하수도 같은 기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어요. 도시는 혼돈에 빠졌고, 사람들은 숨 쉴 곳이 필요했죠. 도시 문제의 해법 중 하나가 ‘공원’이었습니다.
홍진호 교수배 교수님 말씀처럼 과학기술 발달은 인간 삶에 큰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산업혁명은 물론,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뒤흔든 다윈주의도 연장선에 있죠. 이후 인간은 신 중심의 고정된 진리를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게 됐습니다.
홍진호 교수AI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네요. 챗GPT 같은 생성형 AI는 글쓰기나 예술적 창작처럼,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여겼던 영역에 빠르게 침투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전통적으로 ‘쓰기’와 ‘읽기’라는 두 축 위에 서 있는데, 지금은 양쪽에서 모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검색엔진보다 유튜브에서 정보를 찾고, 과제는 AI를 활용해 해결합니다. 우려되는 부분도 있지만 AI가 제시하는 예시나 소재의 확장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결국 도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주체적인 생각을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배정한 교수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Herbert Marshall McLuhan)은 이미 1960년대에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을 남겼죠. 도구로만 여겼던 매체가 인간의 사고와 표현 방식을 바꾸는 주체라는 뜻입니다. 도시와 공간 설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으로 설계하던 시절에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같은 유기적 곡선의 건축과 파라메트릭 디자인(parametric design)*을 상상하기 어려웠고, 상상한다 해도 도면으로 그려낼 수가 없었죠. 하지만 디지털 기반의 디자인 매체가 전에 없던 형태를 생성하고 있어요. 달라진 기술이 건축과 경관, 도시 공간 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공원, 길 같은 공공 공간은 도시에서 틈이 되었으며,
누구도 소유하지 않지만 모두가 자유롭게 누리는 역설적 장소로 자리 잡았다.
배정한 교수공원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공원, 즉 퍼블릭 파크(public park)는 1830~40년대 영국과 1850년대 미국에서 본격화된, 근대 도시의 발명품입니다. 산업화로 도시가 팽창하고 혼잡해지면서 공간적 진통제, 공유할 여가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공원과 도서관을 현대 도시의 ‘사회적 인프라’라고 말합니다. 공원은 자본주의 도시에서 가장 역설적인 곳입니다. 누구도 소유하지 않지만, 누구나 자유롭게 머물며 연대할 수 있는 장소죠.
홍진호 교수베를린은 산업혁명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18명이 한 방에 사는 일이 있을 정도로 노동자들의 주거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소시민들이 쉬는 날 놀러 갈 곳이 드물어서 이때 공원이 많이 생겨났다고 짐작됩니다. 위성 사진을 보면 지금도 베를린은 주택과 녹지, 상업 건물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구분 없이 자연을 접하니까 사람들이 삶의 균형을 회복하기 좋죠. 반면 우리나라는 녹지와 주택 경계 윤곽이 굉장히 분명해요.
배정한 교수주거지, 상업지구, 공업지역, 교육시설, 공원녹지로 도시를 구분해 계획했다는 뜻입니다. 근대 도시계획의 기본 원칙은 조닝(zoning), 즉 ‘용도지역제’거든요. 조닝에 기반한 서울 같은 자동차 도시는 사람 사는 곳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걸 전제합니다. 반면 요즘 주목받는 파리의 ‘15분 도시’ 캠페인은 조닝을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예요. 걸어서 15분 거리 내에서 모든 일상이 해결되는 도시를 만들자는 거죠. 용도지역의 구분을 무너뜨려 도시 공간을 유연하게 쓰자는 겁니다.
홍진호 교수윤곽을 유연하게 만드는 시도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울을 정말 좋아하지만, 강아지와 산책을 할 때마다 아쉬움을 느끼거든요. 아파트 단지나 상가 옆길을 걷는 건 ‘통행’이지 ‘산책’은 아니니까요. 반면 베를린은 강아지를 데리고 나가면 곧바로 녹지가 이어집니다. 인간이 만든 인공물과 자연이 적절히 어우러지는 지점이 쾌적하게 느껴지죠.
기술과 제도를 비롯한 다양한 요소들이 뒤섞일수록 본질적인 질문에 집중해야 한다.
미래는 답을 찾는 과정과 태도에서 비롯한다.
홍진호 교수다양한 천재들이 등장합니다. 독일은 세기 전환기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따르는 토마스 만(Thomas Mann)과 실험적인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나란히 활동하며 주목받았어요. 천재는 어느 시대에나 비슷한 확률로 존재하지만 격변기에는 훨씬 또렷이 드러납니다. 천재들은 보통 사람이 수십 년 후에나 알아챌 법한 징후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니까요. ‘천재의 시대’라 부를 만하죠.
배정한 교수함민복 시인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라는 시 구절이 떠오릅니다. 고통과 혼돈의 시기인 사춘기는 인간이 아름다운 것을 가장 많이 꿈꾸며 성장하는 때잖아요. 생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갯벌이나 갯골처럼 이질적 환경이 맞닿은 에코톤(ecotone; 이행대)에는 정말 다양한 생명체가 거주합니다. 불안정해 보이지만 가장 풍요롭고 역동적이죠. 그런 면에서 전환과 경계는 쌍을 이루는 말이 될 수 있겠네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상호 침투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니까요.
홍진호 교수우리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의 구분이 급격히 허물어지는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흐름을 ‘위기’나 ‘혁신’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복잡한 것은 복잡한 채로 바라보면 어떨까요? 성급한 판단 대신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배정한 교수사람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존재인데, 먹고 입는 일에 비해 머물며 사는 자리인 공간에 관해선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시 공간은 점점 양극화되고 누구나 불편을 겪지만 정작 그것을 돌볼 여유는 없죠. 다행히 최근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도 공간과 장소의 문제를 활발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공간에 대해 더 치열하게 묻고 답해야 합니다. 공간 문해력을 길러야 합니다.
‘도시를 걷고 공원을 읽는 사람’ 배정한 교수는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로 환경미학, 조경이론과 비평, 서양조경사를 연구하고 가르쳐왔다. 용산공원,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공원, 광교호수공원 등의 계획에 참여하며 이론과 실천의 교집합을 확장해왔고 『공원의 위로』, 『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 등의 저서를 펴냈다.
‘독일 문학과 운명처럼 만난 남자’ 홍진호 교수는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세기 전환기 독일어권 문학과 문화, 독일 공연예술을 연구하고 가르쳐왔다. ‘문학이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라는 믿음으로 학문과 대중을 잇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며 『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 『욕망하는 인간의 탄생』 등의 저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