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구
라젠드라 카르키(Rajendra Karki) | 생명과학부 교수
라젠드라 카르키 교수의 연구 환경과 방향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스스로 선택한 것도 있고 우연히 찾아온 것도 있었지만 오롯이 유지한 두 가지가 오늘을 만들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물음, 기꺼이 낯선 영역으로 내디뎠던 발걸음이다.
※ ‘탐구’ 섹션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을 다수 보유해 상위 1% 연구자(HCR, Highly Cited Researchers)에 이름을 올린 서울대 사람들을 만나, 연구의 과정과 그 이면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네팔 포카라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던 시절, 라젠드라 카르키 교수는 ‘분자나 세포 수준에서 약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왜 같은 질병에 서로 다른 약물이 처방되는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에 매료됐다. 이 질문들은 약물의 치료적 개입에 대한 호기심에 불을 지폈고 그의 발길을 한국으로 이끌었다.
“약리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목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한약자원학을 공부하며 처음으로 실험적 생의학 연구를 접했고, 지도교수님의 혈관성형술을 보조하며 약물의 치료적 개입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죠.”
석박사 과정을 마친 뒤에는 미국의 박사 후 연구원에 지원했지만 순탄하지 않았다. ‘한약’이라는 낯선 배경 탓이었다. 여러 차례 도전 끝에 미주리캔자스시티대(UMKC)에서 선천면역과 염증 신호전달 연구를 이어가던 그는 얼마 후, 세계 최고의 소아 난치병 연구 기관인 세인트 주드 아동연구병원(St. Jude Children’s Research Hospital)으로 자리를 옮겼다.
“규모도 크고 경쟁이 치열한 연구실이라 초반에는 압도당하는 느낌이었어요. 다행히 중개 연구가 활발했고 치료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분위기라서, 저의 약리학적 배경이 독특한 강점이 되었습니다.”
네팔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다시 미국으로 향했던 여정이 한 점으로 모였던 이 시기, 그의 연구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기존 통념을 뒤흔드는 의문이 싹텄기 때문이다.
카르키 교수가 품은 의문은 세포사멸1 즉, 세포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병원체2 로 인한 감염이나 손상이 번지는 것을 막는 세포사멸은 평소에는 해롭지 않지만, 과도해지면 세포가 죽으면서 쏟아내는 염증 물질이 정상조직까지 자극할 수 있다. 세포의 죽음을 멈추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당시 학계에서는 세포사멸 경로들이 독립적으로 작용할 테니 특정 경로 하나만 차단하면 세포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예측했다. 그런데 연구를 거듭할수록 카르키 교수의 눈에는 이 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보였다.
“병원체 속에 세포를 자극하는 다양한 성분이 있으니, 세포 감염 시 이 성분들이 보내는 신호들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경로를 한꺼번에 차단하면 어떻게 될지 실험했어요. 처음에는 하나, 그다음에는 두 개를 함께 막았는데 변화가 없더군요. 서너 개를 차단하니 그제서야 세포사멸이 멈췄습니다. 세 가지 세포사멸 경로가 하나의 프로그램처럼 작동한다는 의미를 담아 저희 연구팀에서는 판옵토시스(PANoptosis)3 라는 이름도 붙였지만 학계에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기존과 다른 개념인 만큼 곳곳에서 질문이 쏟아졌고 카르키 교수는 후속 논문을 통해 차근차근 답을 내놓았다. 우연도 겹쳤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면역 반응이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자기 조직을 공격하는 사이토카인 폭풍4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카르키 교수는 판옵토시스를 코로나19 중증화 기전과 연결지었고, 2021년 세계적인 학술지 《셀(Cell)》에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세계 학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1 세포사멸: 세포 스스로 죽음을 실행하는 과정. 손상되거나 감염된 세포를 없애 몸을 지킨다. 죽는 방식에 따라 여러 경로로 나뉜다.
2 병원체: 몸에 들어와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세균, 곰팡이 등의 미생물
3 판옵토시스(PANoptosis): 따로 작동한다고 여겨지던 세 가지 세포사멸 경로가 하나로 통합돼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 PAN은 ‘모두’를 뜻하는 그리스어 접두사
4 사이토카인 폭풍(cytokine storm): 면역세포가 주고받는 신호물질이 과다 분비돼 염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정상 조직까지 공격하는 상태
2023년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부임한 카르키 교수는 2024년과 2025년 연속으로 상위 1% 연구자에 선정됐다. 그가 이끄는 선천면역 및 세포사멸 연구실(Lab of Innate Immunity and Cell Death) 구성원들은 “교수님이 우리 연구실의 자랑”이라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저 혼자만의 성과나 영예가 아니라 모두의 것이죠. 학생들과 연구원, 함께한 동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애써준 덕분이니까요. 저는 오히려 이런 환경에서 연구하는 행운을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이 행운은 사실, 치밀하고 따뜻한 멘토링의 결과다. 카르키 교수는 연구의 기초 자세를 가르칠 때는 꼼꼼하고 단단하게, 연구 과정 중에는 누구든 편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힘쓴다. 다만 실험 중 이상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반드시 기록해 두라고 강조한다. “부정적인 결과는 좋은 대조군이 되니, 과학에서는 실패도 정보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쌓아온 시간 위에서 그는 다음 연구로 나아가고 있다. 세포 대사가 선천면역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염증 반응을 어떻게 조절하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연구가 무르익으면 병원체를 직접 겨누지 않고도 감염병과 염증성 질환은 물론 비만·당뇨 같은 대사질환의 치료전략을 수립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언제쯤 구체화될 것 같냐고 묻자, 카르키 교수는 연구 철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학생들에게도 늘 하는 말인데, 학점이나 학위 등 보이는 성과만 목표로 삼으면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실험이 계속 실패하거나 진전이 없을 때 지치기 쉬우니까요. 호기심과 열정을 지키며 삶과 연구의 균형을 맞추면 자연스럽게 원하는 지점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사물질이 염증성 세포사멸을 조절하는 과정을보여주는
세포사멸의 대사 회로 (The Metabolic Circuitry of Cell Death)
선천면역과 세포사멸 분야의 세계적 연구자. 판옵토시스(PANoptosis) 개념을 정립해 세포사멸 연구의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에서 선천 면역 및 세포사멸 연구실(Lab of Innate Immunity and Cell Death)을 이끌고 있으며, 클래리베이트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연구자(HCR)’에 2024년과 2025년 연속으로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