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view
최춘웅 건축학과 교수
건축도 친환경적으로 짓는 방법이 있다. 바로 건물을 새로 짓지 않는 것이다. 건물 그대로를 재활용하고, 새로 건설하는 부분을 최소화하는 것. 최춘웅 교수가 추구하는 건축의 방향이다.
건축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아무것도 없던 황량한 사막 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세우는 것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축과, 존재하던 건축물의 역사와 가치를 인정해 이를 부수지 않고 새롭게 꾸미는 새활용(Upcycling) 건축이 바로 그것이다. 최춘웅 건축학과 교수의 시선은 새활용 건축에 쏠려 있다. 건축 프로젝트
이면에 깔린 역사적 맥락과 사회 문화적 배경을 톺아보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재해석해 리모델링으로 승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에서 행복과 보람을 얻는다.
“건축가로서 첫발을 내딛던 초창기에 전시 공간 설계를 많이 수행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어진 공간 안에서 어떻게 건축적으로 개입해야 전시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을지를 많이 고민했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학부생 때 무대디자인을 했던 경험도 지금의 활동 방향성에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공연의 모든 요소는 대본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무대디자인 또한 주어진 대본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이뤄집니다. 다시 말해 대본이라는 틀 안에서 무대디자인 역량을 발휘해야 하죠. 이런 경험이 하나둘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존 공간을 활용하는 프로젝트를 더 많이 진행하게 됐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최춘웅 교수가 대학원 시절 역사학도를 꿈꾸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건축이 자신에게 더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역사를 향한 관심과 애정은 지금까지도 마음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나아가 건축에 역사를 접붙이는 그의 설계 활동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단순히 부여받은 설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자 건축물의 뒷이야기를 살펴보는 건축가의 결과물, 그리고 건축물 곳곳에 쌓인 세월의 흔적과 배경을 깊이 파고들어 그 가치를 부각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는 건축가의 결과물. 이 두 가지는 확연히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최춘웅 교수는 점촌중학교, 상하농원, 매일유업 중앙연구소 등 여러 작품을 설계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작품은 어린이대공원 관리동이자 복합문화공간인 ‘꿈마루’다.
이곳은 원래 국내 최초의 골프장 클럽하우스였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골프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어린이를 위한 공원을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준공 1년 만에 어린이대공원 교양관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공원의 주요 행사 장소 역할을 하면서 상황에 맞게 외관을 덕지덕지 덧댄 끝에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건물이 됐다. 하지만 재건축을 위한
심의 중, 4개의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에 지붕이 매달려 떠 있는 독특한 구조라는 것이 파악됐다. 특히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인 나상진의 작품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극적으로 새활용이 결정됐다. 그 설계의 중심에 바로 최춘웅 교수가 있었다.
“김중업과 김수근은 스타 건축가로서 알려졌지만, 이보다 앞서 왕성하게 활동한 나상진은 건축계에서도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이른바 ‘잊힌 건축가’였습니다. 꿈마루는 건축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에 몰두해온 저에게, 매우 흥미로운 프로젝트였는데요. 이 건물의 숨겨진 가치와 그간의 역사를 내보이겠다는 목표에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불필요한
외관을 걷어내되 세월의 흔적은 곳곳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꼭 필요한 관리동 면적을 제외한 나머지 3분의 2 영역을 외부와 연결해 다채로운 면모를 지닌 관리동 겸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나상진이라는 이름도 세상에 각인시킬 수 있었던 의미 깊은 프로젝트였습니다.” 2022년 5월 대중에 공개된 노량진 지하배수로 설계도
최춘웅 교수에게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배수로는 서울시 동작구청에서 시행한 노량진 수산시장 인근 침수 해소 사업 과정에서 발견됐는데, 약 125년 전에 만들어진 말발굽형 배수로부터 산업화 시대에 조성된 콘크리트 배수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조로 구성돼 있어 토목공학 역사적 가치가 높았다.
최춘웅 교수는 시민들이 이곳의 의미를 되새기면서도 지하배수로 특유의 공허한 분위기와 빛의 공백 속에서 다양한 사유를 펼칠 수 있도록 내부 공간을 구성했다. 또 방문객들이 지하배수로가 땅 위로 솟아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게 진입 시설을 뾰족한 삼각 형태로 설계했다. 설계할 시설에 대한 다방면의 학습 과정과 깊은 고찰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최춘웅 교수의 ‘건축 역사 사랑’은 그가 2018년 큐레이터 겸 작가로 참가한 베니스비엔날레 제16회 국제건축전 한국관 전시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당시 한국관의 주제는 ‘스테이트 아방가르드의 유령’으로, 1960년대 한국 최고 건축가들이 모여 있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작업에 집중했다. 세운상가, 한강연안개발, 삼일고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중문관광단지, 보문관광단지 등 현대 한국을 형성한 개발 계획을 주도한 기관임에도 그 역사와 기록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제 작업실이 세운상가에 있었습니다.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치가 좋고 경치가 근사해서 여러모로 만족스러웠죠. 때마침 세운상가를 설계, 시공한 한국종합기술 개발공사의 아카이빙 전시에 참여하게 돼 기뻤습니다. 그만큼 최선을 다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아울러 이 작업을 하면서, 제가 건축 역사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최춘웅 교수는 여러 명의 다른 학과 교수들과 함께 서울대 중앙도서관 리모델링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초기 관악캠퍼스를 설계 자문한 DPUA(Dober, Paddock, Upton & Associate)는 ‘우리 캠퍼스의 중심은 도서관이다’라고 명시했죠. 배치를 봐도 제일 중앙에 있고요. 때문에 중앙도서관은 상당히 중요한 건물입니다. 과거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그 시대 세계 건축계의 흐름으로 볼 때 이보다 더 어울리게 지을 수
없었을 겁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은 지금 봐도 보존이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탓에 건물이 낡고 부분적으로 훼손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번 리모델링에서는 행정적인 것보다는, 어떤 식으로 건물이 바뀌면 좋겠는지를 중점적으로 고심했습니다. 예전 도서관처럼 책을 읽고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활동들이 벌어지는 공간으로 개선되길 원한다는 요청사항을 전달받았고요.
주어진 건축물 안에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걸 계속 찾아드리는 게 저희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도서관
리모델링 관련해 효율적인 조언을 계속 드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중앙도서관에서는 이벤트나 심포지움, 수업도 할 수 있다. 또 4~5명이 모여 토론도 할 수 있는 기존보다 창의적인 공간으로 재탄생될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지난 9월 최춘웅 교수는 새 프로젝트를 맡았다. 광주광역시에서 추진 중인 무등산 남부권 관광사업의 총괄계획가로 위촉된 것이다. 그는 작업하면 할수록 과거에서 새로운 것을 깨닫는 요즘이라며 건축에 대한 그의 철학을 말한다. “건축학에서는 1학년부터 배우는 게 하나 있는데요. 바로 ‘오리지널한 건 없다’라는 것입니다. 건축에서는
‘내가
처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사실 거의 없습니다. 오랜 시간 많은 건물이 지어졌고 그래서 오리지널리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건축가 대부분은 생각합니다. 새로운 것, 오리지널한 것을 찾기보다 과거의 것들을 잘 알아도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건축가의 창의적인 방식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