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먹는 행위로, 이어지는 삶의 순환을 표현하다

이페로 작가 (동양화과 95학번)

창의적인 영감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엔진을 계속 켜놓은 채 달리고 있어야 하나씩 연결되는 무언가가 생긴다. 이페로 작가는 밤마다 잠들기 전 ‘내면으로의 여행’이라는 자신만의 시간을 통해 작업의 화두를 띄우고 있다.

이페로 작가의 작품은 그녀의 작가명과 일맥상통한다. 이페로라는 이름은 ‘먹고(Eat), 그리고(Paint), 사랑하는(Love)’이라는 의미다. 그녀는 어떤 생명의 죽음이 어떤 생명의 연료일 수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가 잔혹하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런 순환 시스템이 ‘먹는 행위’를 매개로 한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흥미로웠다. 모든 생은 유한하다는 규칙이 있으니까 말이다. 음식을 보는 관점은 다양하겠지만, 그녀에게 음식은 삶의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소재로 다가왔다.

지난해〈디어 마이 케이크〉개인전을 진행했는데, 작가로서 소회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2023년 10월에 개인전을 한 후, 바로 이어서 5개월 동안 전시를 준비했습니다.〈디어 마이 케이크〉가 2개의 공간을 쓰는 전시로 규모가 상당히 컸습니다. 준비 기간이 짧았던 만큼, 몸과 마음을 하나도 남김없이 집중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30대에 작업할 때는 힘들다는 느낌이 지배적이었어요. 이 작업을 왜 해서 힘들게 사나.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완전히 몰입하는 시간 동안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디어 마이 케이크〉전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지요?

순수 회화작업에서 어떤 메시지를 정해 놓고 작업을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굳이 말하자면, 상당히 보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는데요. 제가 케이크를 모두 인물로 상정해두고 그 인물을 케이크로 묘사한 작업이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 자체가 가볍고 상쾌한 삶은 없다, 그래서 너도 아팠구나, 이런 이해하는 마음이 요즘 시대에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느낌들이 전해지길 바랐던 것 같아요. 케이크가 화려하고 달콤하고 예쁘지만 내면에는 어쩔 수 없는 상처와 슬픔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저에게 치유였듯이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치유, 따뜻한 마음이 닿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 너그러움 같은 그런 감정 말입니다.

해당 개인전을 준비하기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새롭게 깨달은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참 재미있는 작업이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이 부분이 제일 크고요. 두 번째는 소소하긴 한데, 케이크라는 음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작업을 준비하면서 케이크의 정체성, 정의를 찾아봤습니다. 케이크라는 영어 단어의 의미가 ‘가루로 뭔가를 만드는 것’으로 나와 있더군요. 케이크는 가루에서 시작해 가루로 끝나는 것이구나, 이 모든 것은 무너짐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했어요. 케이크를 주제로 여러 작품을 선보였는데, 세상은 결국은 먼지가 돼가는 과정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Holy Wish〉2022 mixed media on canvas 145.5x112cm Ⓒ이페로

〈마르가리타 공주〉나 〈아멜리에〉작품의 경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케이크 같지만, 그 이면을 다시 들여다보면 상처받은 이미지들이 느껴집니다.

두 작품의 경우 특정 캐릭터를 케이크로 그렸습니다. 아멜리에는 영화의 주인공이고요. 마르가리타 공주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에 나오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에서 느낌을 가져왔습니다. 역사적으로 마르가리타 공주는 합스부르크왕가의 공주였는데, 생물학적 무지와 인간의 욕망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공주입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이노센트 10세 교황의 그림을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기 느낌으로 해석했는데요. 저는 반대로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공주를 프랜시스 베이컨식으로, 제 해석대로 그렸습니다. 마르가리타 공주의 붕괴하는 삶 속에 숨겨진 공포와 불안, 이런 감정들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빌려 그렸기 때문에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더 비극적으로 느껴집니다.

작품들을 보면 흐릿하고 뭉개진 느낌들이 많은데, 이를 통해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흐릿하고 뭉개진 기법은 이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데요. 제가 ‘스와이프 아웃’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이폰의 잠금 해제 개념을 가져다 붙였습니다. 일단 캔버스에 무너지기 쉬운 파스텔 가루로 그림을 공들여서 그립니다. 그다음에 제소랑 물을 이용해, 큰 붓으로 휙 쓸어버립니다. 이런 기법이 제가 처음 쓴 것은 아니고요. 예전부터 여러 작가가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각자의 느낌 따라 표현했습니다. 저는 흐릿하고 뭉개지는 것이, 정지돼 있지 않고 명료하지 않아 오히려 현상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전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고른다면, 그리고 이유를 함께 듣고 싶습니다.

한 개만 고르는 것이 어렵긴 한데요.〈Birth〉라고 탄생에 대한 작은 케이크 그림에 애착이 좀 더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케이크를 주제로 그렸던 시작점이었거든요.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케이크를 보면서, 탄생이라는 본질적인 의미를 고찰하게 됐습니다. 인간의 탄생이 정말 축하받을 일인가, 그런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탄생이라는 이면에 들어있는 반장식적이고 반축하적인, 반기념적인 느낌을 ‘스와이프 아웃’이라는 기법으로 밀어서 흘러내리게 했어요.

전시를 통해 전달받는 작품들에 대한 피드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뮤지엄 전시에서는 그림 판매를 안 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그림에 대한 반응은 듣는데요. 일단 그림 구매가 그림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반응입니다. 한 그림에 대해 여러 사람이 구매 의사를 표현하면, 반응이 좋은 것으로 감지하죠. 물론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요. 또 비평하시는 분들의 의견도 듣는데요. 이제까지는 ‘우선 화사한 색감에 이끌려 그림 앞까지 오게 되고, 화면 앞에 서면 뭔가 알 수 없는 쓸쓸함이나 서글픔이 느껴진다’라는 공통된 피드백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림에서 어떤 양가성, 화사함과 처연함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어떤 비평가분은 ‘발작적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화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지요?

예술은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고단함이 있고 정당한 보상을 받기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쇄신을 통해 한발씩 나아가려 애쓰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감동합니다. 우선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화가를 해 볼지 말지에 대한 답도,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답도 모두 자기 자신 안에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이페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어떻게 이어 나가고 싶은지요?

다음 전시는〈자두〉라는 그림인데요.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마당에 심으신 자두를 떠올리며 작업했어요. 너무 맛있는 자두였는데, 그런 맛을 내려고 할아버지는 남은 고기의 부산물을 자두 밑에 비료로 주곤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충격적이었는데 맛있는 자두를 얻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순환, 연료, 인생과 이어지더라고요. 〈디어 마이 케이크〉 전시회도 〈자두〉와 맥락이 이어지는 작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앞으로는 물처럼 유연하고 자유롭게 흐르면서 어떤 깊음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종래에는 그 물이 누군가를 치유하는 따듯함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예술은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끊임없는 쇄신을 통해 한발씩 나아가려 애쓰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감동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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