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식물병 연구로
공존의 길을 찾습니다

손호경 농생명공학부 교수

환경문제는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우월감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존의 지혜. 인간과 식물은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을까? 식물병 방어의 최전선에 선 서울대학교 식물병원장 손호경 교수를 만나 그에 대한 답을 들어보았다.

인간은 식물을 손수 채취해 영양 공급원으로 활용했으며, 농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재배하기 좋은 품종을 선택하고 품질과 수확량을 늘리고자 애썼다. 이처럼 인간은 생존을 위해 식물을 식량으로 활용했지만, 식물은 생육 과정에서 지구 생태계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활동을 한다.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메시지에 공감하는 이가 많은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손호경 교수에게도 성장기를 함께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시골집 마당 한편을 차지한 대추나무는 집 앞 풍경을 채우는 조경수이면서도 계절이 바뀌면 순순하게 열매를 내줬던 다정한 친구였다. 그래서일까. 어느 날 갑자기 그 나무가 병에 걸려 생명을 다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았다.
“나무 병해 가운데 ‘대추나무빗자루병’이라는 게 있어요. 이 병에 걸리면 가지 끝부분의 작은 잎과 가는 가지가 빗자루 형태로 나면서 꽃이 피지 않다가 엄청나게 많은 잎이 생기고 이듬해 죽어버리죠. 무척 좋아했던 그 나무가 안타까운 모습으로 마지막 순간을 맞았던 장면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어요. 그때는 제가 식물병리학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막상 대학에 진학해 진로를 선택할 때 그 기억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농사를 짓고 텃밭을 가꾸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그에게 농작물을 비롯한 식물의 생장과 병해충은 낯설지 않은 분야였다. 현재 손호경 교수는 식물병생리학연구실을 운영하며 인류의 주식 작물에 해당하는 밀, 옥수수, 보리, 벼 등에 발생하는 식물병을 연구하고 있다.
“제가 주로 연구하는 대상은 곰팡이독소입니다. 주식 작물로 꼽히는 밀, 보리, 옥수수 등에 병이 발생하면 생산량이 줄어들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곰팡이가 만든 독소가 식물에 잔류하는 데 있습니다. 식물병원균도 역시 생태계의 일원으로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생존하기 위해 독소를 분비하도록 진화했거든요. 이런 부분은 국민보건과도 직결됩니다. 당연히 국가마다 곰팡이독소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어서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데, 이를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도 식물병리학 영역 중 하나입니다.”

영화 속 기후위기, 현실이 된다면

집 앞까지 손쉽게 농산물을 배송받는 도시인에게, 식물병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농산업이 크게 발전한 지금도 식물병의 피해는 여전히 존재하며, 전쟁과 기근으로 인한 문제도 사라지지 않았다.
“산업혁명 이후 인구가 급증하면서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한 지금도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외부 요인이 발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식량자급도가 낮은 국가부터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밀 수출이 제한되면서 국제 거래 가격이 급등한 것처럼요.”
기후위기 역시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손호경 교수는 영화 <인터스텔라>를 언급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최소한의 작물만 재배할 수 있는 식량위기는 영화적인 설정에 가깝지만,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기후변화로 작물의 재배 지역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식물병에 한정한 위기만 고려해도 대응은 필요하다. 식물병이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은 이미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식물병의 역사를 보면 단순히 농산업 영역에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자역병으로 아일랜드 대기근이 발생했고, 미국 동부에서 발생한 밤나무줄기마름병 때문에 그곳에서는 아직까지 밤나무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연구하는 식물병도 인류의 주식 작물에 주로 일어나는데, 만약 이런 식물병이 크게 발생하면 세계 곡물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식물병리학자를 포함한 식물 관련
연구자들이 요즘 가장 관심을 둔
주제는 ‘지속가능성’입니다.
식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화롭게 구축하면 인간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도 적당한
생산량을 확보할 수 있어요.

나무도 아프면 의사를 만나야 한다

식물병리학자로서 그의 활동은 서울대학교 식물병원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1999년 수목병원으로 문을 연 서울대학교 식물병원은 23년 동안 수목병 관련 교육과 연구를 선구적으로 수행해왔다. 임상 진료를 하는 동물병원과 달리, 식물병원에서는 권역별로 발생하는 전국의 수목 관련 문제에 대응하고 해결책을 찾는다. 2018년부터는 개정·시행된 수목보호법에 따라 조경과 수목에 관한 진단 및 처방은 나무의사만, 예방 및 치료는 수목치료기술자만 할 수 있게 되면서 나무의사와 수목치료기술자 양성기관의 역할도 하고 있다.
“식물병원에 있다고 하면 어떤 분들은 ‘우리 집에 있는 반려식물이 아픈데 치료할 수 있을지’ 묻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런 치료를 하는 기관도 있지만, 서울대학교 식물병원은 좀 더 국가적인 차원에서 식물병에 접근합니다. 얼마 전에도 한라산 주요 수목인 구상나무의 기후변화로 인한 병해충 문제를 해결하려고 현황을 파악하고 왔습니다. 전국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이슈가 발생하면 그에 대응하는 일을 주로 하지요.”
서울대학교 식물병원은 ‘에코캠퍼스 프로젝트’를 통해 캠퍼스 내 조경수를 점검하는 일도 맡고 있다. 캠퍼스 곳곳에 있는 나무들의 건강을 모니터링하고 자문한다. 조경수의 병해충 진단과 처방을 할 뿐만 아니라, 일부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외과수술도 시행한다.
“캠퍼스 조경수 관리는 서울대학교 학술림에서 주관합니다. 식물병원은 우리 학교 부속기관으로서 조경수의 상태를 점검, 개선하고 있어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나무들도 내부를 살펴보면 위험한 상태일 수 있거든요. 혹시라도 나무가 불시에 쓰러지면 사람도 피해를 볼 수 있잖아요. 최근에도 캠퍼스 곳곳의 느티나무와 벚나무 등 몇 그루의 위험목을 발견하고, 대처했습니다.”
손호경 교수는 “식물병과 사람이 걸리는 병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건강을 타고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식물도 유전적으로 병에 저항성이 큰 개체들이 있다. 대신 허약한 사람도 양질의 음식을 섭취하고 운동과 휴식을 병행하면서 저항성을 높여가듯, 식물 역시 생육 환경을 잘 조성하면 한결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식물병리학자를 포함한 식물 관련 연구자들이 요즘 가장 관심을 둔 주제는 ‘지속가능성’입니다. 식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화롭게 구축하면 인간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도 적당한 생산량을 확보할 수 있어요. 이미 농업에서는 ‘IPM(Integrated Pest Management)’이라 부르는 병해충종합관리를 통해 식물병 제어 전략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건강한 식물체를 선별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외부에서 병원균이 유입되지 않도록 균형 잡힌 관리를 하는 것이죠.”

식물병 연구에 사용되는 식물.

식물병원성곰팡이 샘플.

인간과 식물의 공존 방법을 찾는 길

식물은 사람처럼 개체 하나에 집중해 치료하기도 하지만, 작물의 경우 더 큰 피해를 막고자 예방에 중점을 두는 편이다. 예를 들어 고추나무 한 그루가 병들면 그 나무를 뽑아버리는 것이 전체 고추밭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이를 두고 손호경 교수는 “어떻게 보면 인간들은 식물병과 싸우면서 식물과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셈”이라고 말한다.
“지난 2020년은 UN이 정한 ‘식물 건강의 해’였습니다. 작년부터는 매년 5월 12일이 ‘세계 식물 건강의 날’로 지정됐고요. 이러한 움직임도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요. 토양오염, 용수오염 등으로 농지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100년 후에도 인간과 식물이 건강하게 공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있는 식물을 건강하게 키우고, 적정 기술을 활용해 더 잘 키워서 생산량 감소를 막자는 것이죠.”
‘하이테크’가 주목받는 세상에서 ‘적정 기술’을 논하는 식물병리학자는 지구에 위기가 닥쳐야 비로소 주목받는 운명이다. 그래서 손호경 교수는 스스로 ‘일상에 드러나지 않을수록 좋은 연구자’라고 말하며 식물병 방어의 최전선에서 묵묵히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맥류 붉은곰팡이병에 의해 지난 1998년 전국 맥류 재배 면적 8만 2001㏊ 중 3만 9202㏊(47.8%)가 피해를 입어 국내 농산업에 큰 타격을 준 바 있다.
① 붉은곰팡이병에 의한 맥류 피해, ② 곰팡이독소 잔류가 심해 수확하지 않고 소각하는 모습, ③, ④ 수확 후에도 붉은곰팡이병에 의해 심각하게 오염된 맥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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