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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부터 시작하는 인간중심주의 비판

글. 이동신 영어영문학과 교수

동물은 좋은 동반자로 인간과 가까워지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최근 <포스트휴머니즘의 세 흐름>을 출간한 영어영문학과 이동신 교수는 인간중심주의 비판은 문학과 문화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인간이라는 말로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해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인본주의의 허상을 들춰내던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인간이 비인간 존재를 생각하고 다루는 방식의 폐해를 들춰내며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한다. 비판할 여지는 충분해 보인다. 해마다 수많은 동물이 인간으로 인해 서식지를 잃고, 죽임을 당하며 사라진다. 인간이 황폐화시킨 자연은 환경오염과 기후위기로 지구의 생명체를 위협하고, 인간이 지질학적 동인임을 의미하는 인류세(人類世)는 종말론에 가까운 우려를 자아낸다.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급속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은 인공지능 시대에 이르러 인간의 우월성과 정체성을 위협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으며, 인간중심주의의 허울을 깨닫게 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연구

1999년 캐서린 헤일즈의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출간으로 대두하기 시작한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의 비판과 해체를 수행하는 학제 간 연구다. 인간중심주의의 폐해가 과학기술, 동물, 자연(혹은 사물)의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목격되기에 포스트휴머니즘도 세 영역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폐해가 인간에게도 피해를 주기에 인간 삶의 안정과 발전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는 반론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또한 인간중심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현실에서 인간 문명의 해체에 가까운 획기적인 변화 없이 인간중심주의 비판이 얼마나 실효적이고 지속적일지도 의문이다. 이처럼 첨예한 입장 사이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지향하는 연구가 바로 포스트휴머니즘이다.
모든 연구가 어렵지만 포스트휴머니즘의 어려움은 일종의 자기모순이기에 더욱 그렇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말과 사고와 행동을 통해 인간을 비판하고 해체하며 비인간 존재의 중요성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기 해체적인 작업인 것이다. 그럼에도 포스트휴머니즘을 연구하는 이유는 현시대가 겪는 수많은 폐해의 원인인 인간중심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절실함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절실함이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동물의 영역에 집중해서 연구를 진행한다. 물론 멸종되어가는 동물을 보호하려는 노력 등은 1970년대 피터 싱어가 동물권 해방 운동을 선도한 이후로 꾸준히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포스트휴머니즘은 이런 동물권 해방 운동에도 인간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하며 좀 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인간중심주의 탈피의 어려움

동물 영역에서 포스트휴머니즘 논의를 선도하는 학자는 캐리 울프다. 동물권 그리고 동물 윤리에 대해 공리주의적 입장을 표방하는 싱어와 합리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톰 리건, 동물학자의 입장을 가지는 제인 구달 등과 울프의 차이점은 “종 중심주의를 대면하고 포스트휴머니스트적인 주체 이론을 고안해야 하는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절박함은 동물을 좋아하는지 아닌지와 전혀 상관없다”라는 그의 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고통받는 동물, 생명권을 위협받는 동물, 독립성을 무시당하는 동물을 보호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울프가 지적하는 것은 그렇게 특정 동물을 보호하려는 순간에 인간중심주의가 은밀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무리 동물을 위한다고 해도 인간중심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언제든 복귀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고통을 주지 않거나 적어도 줄이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입장은 보편적이다. 하지만 이 같은 입장을 동물에 대입하면 애매한 지점이 생긴다. 여전히 고통을 느끼지 않을 거라 여기는 동물이 많기 때문이다. 어류가 그랬고, 이제는 곤충도 그렇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동물들의 중요성이 밝혀지면서 보존 혹은 보호가 필요해졌다는 점이다. 이 경우 그들의 중요성을 고통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대부분 인간의 입장에서 기준이 정해진다.
생명권도 마찬가지다. 모든 생물에게 생명권이 소중한 것은 보편적 사실이지만, 인간의 제한된 능력으로는 보편적으로 보장할 수는 없는 권리다. 특정 동물의 생명권을 우선할 수밖에 없고, 이때 인간 중심적 기준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제인 구달 등이 동참하는 ‘유인원 생존 프로젝트’에 울프가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전히 인간중심주의가 기준이라면 극한 상황에서 인간과 유인원 중 누구를 선택할지는 자명하기 때문이다.

늦었기에 더 절박한 포스트휴머니즘적인 문학적 동물 연구

이렇게 뿌리 깊은 인간중심주의를 어디서부터 비판하고 해체할 것인가? 워낙 폭넓게 퍼져 있어 어디서 시작해도 괜찮겠지만, 문학과 문화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영문학자로서 포스트휴머니즘을 연구하기에 당연한 생각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문학이 오랫동안, 그리고 이제는 문화가 인간-동물 관계 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마 토속신앙을 제외하고 문학만큼 끊임없이 동물이 등장하는 영역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문화가 그 역할을 나눠서 한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의 동물을 문학과 문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다.
무엇보다 문학과 문화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접하면서 우리의 사고 및 생활 방식에 큰 영향을 준다. 그런 점에서 문학과 문화 안에서 인간-동물 관계의 재현 방식이나 그 관계를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일은 포스트휴머니즘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다. 놀라운 사실은 그처럼 동물이 자주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그 역할과 의미를 따져본 연구가 20세기 후반까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문학 비평의 인간중심주의를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휴머니즘적인 문학적 동물 연구(literary animal studies)는 그 늦음에 대한 깊은 반성과 그만큼 더 절박하고 면밀하게 진행해야 할 분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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