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view
이호영 언어학과 교수
고유 언어는 있지만, 기록할 문자가 없어 언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소수민족이 있다. 이호영 언어학과 교수는 소수언어를 표기하는 방법을 개발, 보급에 성공했다. 한 단계 나아가 모든 언어를 한글로 표기할 수 있는 디지털 글꼴을 개발해 한글의 세계화를 실천하고 있다.
지난해 이호영 교수는 한글 세계화를 위해 ‘한글재민체5.0’을 개발했다. 한글재민체는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인 박재갑 교수와,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김민 교수, 수원여대 시각디자인과 김미애 교수와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다.
“한글의 창제 원리를 활용하면 세계 어떤 언어도 발음을 정확히 표기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용한 문자들을 총동원했고요. 훈민정음에서 사용한 가획 원리와 ‘ㅸ’과 같은 병서 표기에 사용한 기호들을 활용해 한글재민체5.0 풀어쓰기 정음체 폰트를 만들었습니다.”
한글재민체5.0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 존재했던 문자들을 최대한 살려 만들었다. 반치음과 옛이응, 여린히읗, 아래아 등은 지금은 쓰지 않지만, 이를 다시 살렸다. 훈민정음 창제 원칙에 근거해 전 세계 어떤 언어의 발음도 표기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한글은 확장성이 뛰어난 문자다. 아설순치후 다섯 개의 기본
자음인 ‘ㄱ, ㄴ, ㅁ, ㅅ, ㅇ’에서 가획의 원칙으로 확장되고, 모음도 천지인 세 자가 서로 결합해 만들어진다.
본래 한글은 모아쓰기가 원칙이다. 하지만 그는 한글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풀어쓰기’가 필수라고 생각했다. 한글재민체5.0은 어떤 언어든 표기도 가능하다. 이호영 교수는 문자 체계를 만들고 싶은 민족이나 나라에 보급하면 좋을 것 같다고 설명한다. 모아쓰기로 표기하기 어려운 언어를 가진 민족들에게 보급하는 데는
한글재민체5.0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한글재민체5.0 풀어쓰기 정음체를 보조 문자로 활용하자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영어 사전을 보면 로마자로 발음을 표기하고 있는데요. 한글로 발음을 표기하면 학습자들이 영어 발음을 배우는 데 더 유리합니다. 한글재민체5.0을 국제음성기호(IPA) 대신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어 발음을 배울 때도 좋고, 장애인들의발음을 적을 때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호영 교수는 오래전부터 한글 세계화 사업에 관심이 높았다. 2009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 바우바우시에 거주하는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하는 성과도 일궈냈다.
언어학 교수이자 발음을 연구하는 음성학자인 그가 한글 세계화를 위해 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은 언제부터였을까. ‘한글의 세계화’란 목표는 이호영 교수의 학부 시절 때부터 시작되었다. 대학생이던 그는 언어학의 배움을 줬던 허웅 교수를 잊지 못한다. 허웅 교수는 학생들에게 ‘한글은 세계적으로 우수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을 늘 강조했다. 이호영 교수는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인 한글을 해외로 보급하지 못하는 부분이 안타깝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에 10명 정도 되는 소수 부족에라도 한글 보급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교수가 됐을 때 마침 지도교수님께서 태국 치앙마이 쪽에 사는 라후족에게 한글 표기법을 만들고 한글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한글 세계화의 가능성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죠.”
시작은 됐지만, 중간에 멈춘 한글 보급 사업을 두고 늘 고민했다. 해결책을 찾은 후, 제대로 성공한 사례가 바로 ‘찌아찌아족 한글 보급 사업’이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모아쓰기를 하잖아요. 그래서 한국어와 음운 구조와 음절 구조가 다른 영어를 한글로 표기하려면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커피’라는 단어를 예로 들면, 영어의 ‘f’ 발음을 ‘p’와 구별해서 표기할 수 없어 두 소리 모두 ‘ㅍ’으로 표기하지요. 영어의 ‘strike’와 같은 단어에서는
어두에 자음이 3개 연이어 나오기 때문에 모음 ‘ㅡ’를 넣어 ‘스트라이크’로 표기합니다.”
찌아찌아족의 언어는 음절 구조가 한국어와 유사했고, 한글로 표기하기에 적합한 언어였다. 이호영 교수는 ‘찌아찌아족 한글 보급 사업’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추진에 앞서 공식적인 진행을 실행했다. 찌아찌아족이 가장 많이 사는 부톤섬 바우바우시에 MOU 문안과 공문을 보냈다. 답장은 2주도 안 돼서 왔고,
공식적으로 한글 보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소수민족 언어 보전의 필요성을 느낀 타밈 시장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찌아찌아족 교사인 아비딘 씨를 한국으로 초청해
1년에 걸쳐 찌아찌아어의 발음 체계를 연구했습니다. 2009년 7월부터는 찌아찌아족이 모여 사는 소라올리오 지구의 까랴바루 초등학교에서, 한글 교과서 <바하사 찌아찌아>로 한글 교육이 시작됐습니다.”
이처럼 그는 2009년 문자가 없는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에게 한글로 된 자기 말 교과서를 만들어줬다. 소수민족의 언어 표기를 한글로 실현한 진정한 ‘한글의 세계화’였다.
지난 5월 이호영 교수는 한 학술행사에서 ‘AI 시대의 교육, K-교육 콘텐츠로’라는 주제로 기조 연설을 했다. 모든 분야에서 AI가 대세인 만큼, 교육 분야에서도 AI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그동안은 AI를 교육에 접목해 교과 과정을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이런 부분에만 집중을 해왔습니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AI와 대한민국 교육 콘텐츠의 만남이 하나의 경쟁력을 지닌다고 봅니다. K-팝처럼 K-교육 콘텐츠를 만들어 해외에 적극적으로 보급하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발표를 했습니다.”
특히 그는 AI 시대에 AI 활용 교육이 가장 시급한 곳이 저개발국가라고 말한다. 인터넷망이 세계 곳곳에 다 깔리고 있고, 아프리카에도 스마트폰 보급은 늘어나고 있다. 서로 만나지 않아도 스마트폰이나 패드만 있으면 언제든지 누구나 AI 기술을 활용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AI 시대, 소수민족 언어가 사라지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정체성이죠. 한국인의 정체성이 한국어에서 오는 것처럼, 소수민족 언어 보존은 중요한 사안입니다. 언어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토착 지혜와 역사, 문화 모든 것이 담겨 있는데요. 소수민족의 언어를
보존하는 일은 그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AI 기술을 활용한 소수민족의 교육도 활발해지길 바랍니다.”
한국은 ‘한류’ 열풍을 지속해서 잇고 있는 문화강국인 동시에 교육 분야의 시스템화도 체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K-교육 콘텐츠를 만들어 저개발국가를 상대로 교육적인 측면에서 공헌한다면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K-교육 콘텐츠를 해외에 보급하는 것이 결국은 한국어와 한글의 세계화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찌아찌아어부터 한글재민체5.0 개발까지, 한글 세계화를 위해 끊임없이 정주행하는 그에게 있어 ‘도전’은 무엇인지 물었다.
“도전이라고 하면 두 가지 정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언어학 교수로서 좋은 논문 쓰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언어학자로서 연구한 지식으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지요. 현직에 있는 동안 연구한 것들을 잘 마무리하고, 퇴임 이후에는 한국어 한글 보급에 더 전력을 기울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