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view
박현묵 학생 (언어학과 21학번)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라는 말처럼, 좋아서 재미있어서 파고드는 사람의 한계점을 예측하기란 힘들다. 자신의 방 안에서 중증 혈우병과 싸우던 시절, 박현묵 학생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독서와 번역을 택했고, 톨킨의 작품 세계에서 자유로운 자신을 발견했다.
박현묵 학생은 중증 혈우병으로 중·고등학생 시절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냈다. 신약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할 수 없는 통증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틈이 날 때면 자신이 좋아하는 J.R.R. 톨킨의 팬 카페에 들어가 그의 작품을 번역하고 원고를 올렸다. 그가 말하는 톨킨에 대한 소위 ‘덕질’은 국내에는 번역된 적 없는 톨킨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번역본을 올리는 행위였다. 2019년 여름, 그는 해외 신약의 임상시험에 참여했고 내출혈이 거의 사라지면서 대학입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동시에 <끝나지 않은 이야기> 번역 계약까지 맺었다. 번역 원고가 출간되면서 프로 번역가로 데뷔하게 됐고, 2021년에는 서울대학교 인문학부에 합격하며 언어학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보통은 몸이나 정신이 아프다고 하면, 쉽게 피곤하고 지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지치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다. 지치고 힘든 마음이 든다는 것은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아픈 시기를 견디면서 많은 책을 읽고, 톨킨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지만, 그는
딱히 한 게 없는 것 같단다.
“할 일 없이 지낼 당시에는 이루고 싶은 것이 없었고 딱히 지칠 만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냈죠. 몸이 아프다고 해서 지치지는 않아요. 답답함이나 우울함이라는 건, 더 좋은 세계를 알고 있을 때 생기는 감정인 것 같습니다. 바깥세상을 몰라 그랬나 봅니다.”
어쩌면 아파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동시에 톨킨 작가에 흠뻑 빠져 번역을 하는 좋은 기억이 존재하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물리적인 바깥세상은 없었지만, 책과 컴퓨터 속 펼쳐지는 톨킨이라는 세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박현묵 학생에게 톨킨은 번역이라는 재미를 깨닫고, 도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해줬다.
“과거에 정주행하고 있던 해리 포터 시리즈를 빌리러 동네 도서관에 갔습니다. 같은 서고에 <반지의 제왕>이 있더라고요. 워낙 유명하고 명성이 자자한 시리즈니, 이것도 한번 봐두자,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빌려 집에 갔습니다. 그 책에 부록이 있는데, 톨킨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관한 온갖 상세한 뒷이야기를 다
풀어놓은 부분이거든요. 그 세계 속에서 사용되는 언어에 대한 별도의 장이 있는데, 그때부터 톨킨의 매력과 함께 언어학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톨킨을 좋아하는 이들과 소통하고 싶어 팬 카페에 번역본을 올리던 작은 도전이, <끝나지 않은 이야기> 번역본 출판이라는 기회로 이어졌다. 당시 그는 매일 생산적인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번역’은 어떤 의미일까.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종의 끼어들 수 있는 틈새시장이라고 표현한다.
“팬심(어떤 대상을 향한 팬의 마음)으로 재미 삼아 올렸는데요. 제가 가입한 톨킨 팬 카페는 이미 톨킨의 매력을 알고 모인 사람들의 공간이었거든요. 시작은 소통 차원이었습니다. 톨킨의 작품 세계가 좋아져서 톨킨 팬덤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컸죠. 저는 소양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톨킨에 관한 대단한
연구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틈새시장은 무엇이 있을까. 그러다 아직 안 나온 책을 번역하자. 이런 발상에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2021년에 참여했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개정할 시기가 오지 않았나, 이런 생각은 늘 머릿속에 품어두고 있다. 박현묵 학생이 생각하는 톨킨의 매력은 무엇인지 묻자, 표정에 미소를 띠며 신나게 말한다.
“우선 작가가 언어학자이자 영문학자이고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쓰는 솜씨가 특출난 사람이었습니다. 톨킨의 소설은 영어 문체가 맛깔나고 고풍스러워요. 난생처음 영어로 된 글이 미적으로도 좋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톨킨의 작품 세계에만 존재하는 톨킨이 만든 ‘가상의 언어’가 개인적으로는 참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언어가 목적인 작가이다 보니, 작품 속에는 정교하고 생생하게 만들어진 언어가 일상적으로 등장하는데요. 거기서 나오는 그 특유의 톨킨만의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너무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톨킨 작가는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미완성의 원고들을 산더미만큼 남긴 채로 세상을 떠났다. 톨킨의 아들이 유고들을 모아 연구하고 정리하고 분석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톨킨이 다른 작가와 차별화되는 매력으로, 작품 세계가 발전해온 과정을 낱낱이 해부해볼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새내기 시절, 인문학부에 입학해 전공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는 올해로 4학년이 됐다.
“번역을 해봐서 언어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고요. 톨킨의 작품을 읽다 보니, 자신 안에 내재된 언어학에 관한 관심을 깨달았다고 할까요? 사실 처음에는 영문학과를 염두에 두고, 선택 과목으로 영문학과 수업을 한번 들어봤습니다. 문학을 할 체질은 아니라는 걸 느꼈죠.”
캠퍼스 생활에 대한 설렘에 관해 묻자, 입학하던 해가 코로나19 시기여서 모든 것이 비대면으로 진행돼 큰 변화를 못 느꼈다며 담백하게 전한다. 다행히 팬데믹은 공식적으로 종료됐고, 그는 올해 상반기 영국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왔다.
“영국에 가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왔습니다. 영어로 수업 듣고 공부하다 보니, 영어학에도 관심이 다시 생기더라고요. 예를 들어 영어의 역사나 영어의 변이 같은 부분에 대한 흥미요. 최근에는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국어의 변화에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박현묵 학생에게 ‘도전’의 의미를 묻자 ‘일단 한번 해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단 저질러봐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번역가로서 도전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톨킨의 아들이 낸 책 중 국내에 번역된 것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후로 지금까지 3권 정도가 다인데요. 아직 한국어로 빛을 보지 못한 톨킨의 작품들을 언젠가는 꼭 완역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