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청춘들이 ‘합’하니 판소리도 ‘힙’하게

김도휘 (철학과 20학번)
여민영 (조소과 20학번)
이혜진 (국악과 20학번)

창작 국악과 현대미술 그리고 철학이 만나 색다른 판소리극으로 탄생했다. 서로 다른 전공을 지닌 학부생들의 협업으로 탄생한
<아니말전>은 어떤 과정을 통해 캠퍼스의 예술을 넘어 문화계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을까.

마침내 부끄러움을 말하다

인간인 소리꾼이 동물들을 모았다. 그리고 저마다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이야기를 털어놓자고 말한다. 호랑이, 황소, 개, 거북, 공작 등 이 자리에 모인 동물들은 부끄러움 대신 자랑거리만 술술 풀어놓는다. 뽐내기는 그만하고 진짜 부끄러움을 이야기해보자는 소리꾼의 제안에 비로소 동물들은 그동안 감춰왔던 부끄러운 모습을 조금씩 털어놓는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라고 해서 동물과 다를까? 판소리극 <아니말전>은 이러한 의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니말전>은 ‘누구나 모난 곳이 있으며, 그것을 인정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주제의 판소리극이다. 조소과 여민영 학생이 쓴 글을 바탕으로 극을 만들었고, 국악과 이혜진 학생은 작곡· 작창·소리·가야금 등 음악을 담당했다. 철학과 김도휘 학생은 <아니말전>만의 작품 철학을 구축할 수 있도록 철학 이론과 관련한 자문을 맡았다.
“멤버들은 제가 모았습니다. 민영이는 친구 따라 제 공연을 보러 와서 알게 된 사이인데, 당시 저에게 따로 전해준 감상평이 무척 감동적이었거든요. 실제로 책을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고요. 도휘 언니는 ‘대학 글쓰기’ 수업에서 만났어요. 발표도 작문도 잘하는 학우여서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습니다.”
세 사람은 2020년에 입학했지만, 처음부터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이혜진 학생은 말했다. 전공도 진로 계획도 다르지만 ‘서울대’라는 소속감과 ‘예술’이라는 공동의 관심사를 통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아니말전>은 지난해 기초교육원에서 개설한 학부생자율연구프로그램에서 태동한 프로젝트다. 이후 문화체육관광부·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2 온라인 미디어 예술활동 지원사업’을 거쳐 2023년 1학기 학생자율세미나(지도교수 국악과 김승근 교수) 수강생들과 협업하며 변화, 발전했다. 대다수 세미나에서는 학술논문을 다루지만, 세 사람은 창작 공연을 직접 기획하고 제작했다.

동물들의 입을 빌려 전하는 청춘들의 속마음

창작극인 만큼 창작자로서 담고자 하는 메시지도 중요했다. 동물을 뜻하는 ‘Animal’과 ‘我怩眜蕋(우리 아, 부끄러워할 니, 무릅쓸 말, 모일 전)’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아니말전’이란 제목은 “우리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자리에 모였다”라는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이 문장은 극의 의의이기도 하지만 저와 같이 미숙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어요. 자기 마음에 드는 모습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내면까지도 모두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상 앞에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여민영 학생이 썼던 극본은 협업 과정에서 한층 밀도 있고 세밀해졌다. 이혜진 학생이 1인 5역을 맡아 연기한 다섯 동물의 캐릭터에는 청년들이 조금씩 가지고 있을 법한 면모를 담았다. 김도휘 학생은 실존하는 철학 이론을 작위적으로 극에 녹이기 보다 ‘<아니말전>만의 철학’을 구축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내며 각색 과정에 참여했다.
“팀에 처음 합류했을 때 극의 주제나 동물의 특성은 완성되어 있었기에 그 안에 철학을 녹여내는 일이 전공생으로서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서로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점점 제 역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작품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도 커졌고요.”
잘난 것을 부러워하는 주변의 시선에 부담을 느끼는 호랑이, 도움이 되는 존재로 남고 싶어 희생에 거리낌이 없는 황소, 자기 장점을 그대로 사랑하지 않고 남의 장점을 탐내는 개, 이기적으로 살아야 손해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북, 전성기를 그리워하며 미래를 그려나가지 못하는 공작의 캐릭터는 그렇게 탄생했다.

함께 써 내려가는 예술을 통한 성장담

문화예술원 파워플랜트에서 쇼케이스로 첫선을 보인 <아니말전>은 서울대학교 학부생연구지원프로그램 총장상을 받은데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아트체인지업 선정(공모당선작) 등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2023 서울대학교 예술주간에도 초청받아 관악아트홀에서 두 차례 공연을 펼쳤다.
여러 차례 공연을 올리는 과정에서 극본은 물론 소품도 많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3D 프린터를 이용해 만든 가면을 썼지만, 지난 9월 열린 관악아트홀 공연에서는 표정을 더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가면을 없앴다. 또한 김도휘 학생은 철학 자문과 홍보·기획을, 여민영 학생은 미술 총괄과 극본을, 이혜진 학생은 음악 총괄과 극본, 작곡 등 세부적인 역할을 맡으며 공연의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관악아트홀 공연에는 학생자율세미나 수강생들이 모두 스태프로 참여했다. 저마다 전공이 다른 20여 명의 수강생들이 공연팀, 미술팀, 음악팀, 기획팀 등 역할을 분담해 전력을 기울였다. ‘제대로 된 한 편의 공연’을 올리기 위해 모인 마음들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아니말전>이 얻은 성과는 노력의 결과일 뿐, 목표는 아니었어요. 캠퍼스 밖으로 나가면 프로들의 융복합 공연들이 차고 넘치잖아요. 수상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그저 제대로 된 공연을 올려보자는 다짐만 했을 뿐이에요. 그래도 대학 시절의 일부를 쏟아 완성한 공연이 작품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게 된 것에는 매우 보람을 느낍니다.”
예술은 아름다움과 추함을 단계별로 구분한 평가표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청춘들의 날것 같은 시도들이 더 빛나는 감동을 전해줄 때도 있다. 세 사람 역시 자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각자의 일상 가운데 예술을 녹여내며 계속해서 나아가고자 한다.

이혜진 국악과 20학번
“<아니말전>을 통해 무대에 서면서
관객들과 숨소리, 감정을 깊이 교감했습니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예술을
향유한다’는 데 있지 않을까요. 저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것이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여민영 조소과 20학번
“아직 학생인 저희는 다양한 장르의 협업에
도전해보며 배워나가는 입장이잖아요.
물론 모든 시도가 성공적일 수는 없죠.
그럼에도 계속해서 <아니말전>이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부딪혀보는 친구들이 모여서가 아닐까요?”

김도휘 철학과 20학번
“공연을 통해 현장에서 소통하면서 갇혀
있던 시야의 벽을 조금은 허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전공이 달라서 서로의 의견을 더
신뢰하고 존중할 수 있었어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저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이해도 얻게 된 계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