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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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영원히 기억될
생명의 발자취
윤지나 서울대공원 박제사(조소과 07학번)
기록하지 않는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모든 생명체도 예외는 없다. 윤지나 박제사는 동물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동물의 생애가 영원히 기록되도록 박제한다. 누군가는 죽음을 보는 직업이라 말하지만, 그에게 지나간 동물의 과거를 기억하고 그 생명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은 삶의 끝이 아닌 두 번째 숨을 불어넣는 시간이다.
생동감 넘치는 찰나를 담다
호랑이 두 마리가 사냥감을 쫓아 눈 위를 달린다. 매섭게 달려드는 호랑이의 쭉 뻗은 앞발에 뺨에 닿을 것 같은 날카로운 발톱이 돋보인다. 뒤따라오는 한 마리는 도약을 위해 온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다. 찰나의 순간을 담은 듯한 두 호랑이는 2016년과 2018년 서울대공원에서 죽은 시베리아 호랑이 ‘코아’와 ‘한울이’다. 박제사 윤지나 동문은 수년간 냉동고에 잠들어 있던 두 호랑이를 1년간 작업 끝에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했다. 13년 박제사 경력을 가진 그는 2015년부터 서울대공원 동물표본제작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국내에서 박제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20명 남짓으로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를 포함해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윤지나 동문은 박물관이 아닌 동물원에서 근무하는 국내 유일한 박제사이다.
“박제가 ‘밀렵꾼의 전리품’처럼 부정적인 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서울대공원에서는 병들거나 고령으로 자연사한 동물을 표본으로 제작해 전시, 교육, 연구에 활용하는 목적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을 표본으로 전시하면, 쉽게 보기 어려운 야생동물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고 수백 년후 어떤 동물이 멸종됐을 경우, 남겨진 표본은 연구를 위한 자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동물이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물자원으로 새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죠.”
마네킹 작업 모습
박제를 위해서는 먼저 죽은 동물을 냉동보관 해놓았다가 제작하기 전 해동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복부를 절개해 가죽을 벗기고 살점을 제거하는 ‘견도’ 작업 후, 화학 처리를 통해 가죽이 부드럽고 유연해지도록 만든다. 이후 준비된 가죽을 마네킹에 씌우는데 이때 마네킹은 해부학적으로 살아있던 개체의 모양과 크기에 알맞게 제작돼야 한다. 눈, 코, 입, 귀, 발 등 세부적인 표현을 하고 봉합한 뒤 몇 주 동안 건조하면 가죽이 머금고 있던 수분이 완전히 날아가 색이 바래는데 이때 색을 다시 칠해줘야 한다.
“박제를 하려면 칼도 다뤄야 하고, 가죽가공, 목공, 용접, 바느질, 색칠, 조각, 캐스팅 등 다양한 작업이 필요해요. 또 정해진 방법이 없어 생물의 종류나 박제사가 선택한 자세에 따라 사용 재료와 박제 방법이 달라집니다. 박제사 스스로 최적의 방법을 찾아야 하는 셈이죠. 그 과정은 어렵지만 나만의 노하우를 만든다는 즐거움이 있어요. 또한 최대한 자연의 모습에 가깝게 만들려고 하더라도 결코 완벽한 박제를 만들 수 없기에 끝없이 공부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왼쪽. 천연기념물 수달의 박제 표본 / 오른쪽. 멸종위기종 눈표범의 박제 표본
과학과 예술의 만남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을 시작해 일찌감치 진로를 정했지만 늘 마음 한편에서 ‘동물과 함께하는 일’을 꿈꿨다. 조소과에 진학한 후에도 진로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며, 수의대 동물해부학 연구실을 자주 찾았는데 이곳에서 골격 표본을 처음 접하며 박제사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평소에도 동물을 관찰하길 좋아하는 윤지나 동문에게 동물의 생김새와 근육의 형태를 표현하는 일은 익숙했고 탄탄한 미술 실력은 이 일을 잘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을 주었다.
“수의대 동물해부학 연구실에서 학부생 인턴으로 일손을 거든 적이 있어요. 그때 로드킬 당한 고라니와 너구리를 해부하면서 공부하고, 골격 표본으로 만들어 보존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골격 표본을 접하다 보니 자연사박물관도 자주 방문했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박제에 관심이 생겼어요. 당시 저를 이끌어주셨던 기무라 준페이 교수님과 교류가 이어져 현재 수의대학생들이 서울대공원 동물표본실에 견학을 와서 실습할 때도 있고 저 역시 수의대로 특강을 나가고 있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국립생물자원관에서 근무하며 박제를 배운 윤지나 동문은 이후 박제 및 표본을 제작할 수 있는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증을 취득하고, 미국 포코노 박제학교를 수료했다. 그러나 생동감 넘치는 포유류 표본을 만드는 일은 국내 자료만으로 한계가 있었다. 고민 끝에 SNS 통해 캐나다 박제대회 챔피언 켄 워커(Ken Walker)에게 조언을 구했다. 윤지나 동문의 실력과 열정을 눈여겨본 그는 포유류 박제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했다.
“켄 워커 선생님을 만나고 동물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실력이 한층 발전했어요. 또 세계무대에 저를 소개해주시고 칭찬해주신 덕분에 작년에 열린 유럽 박제대회에서 세미나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교류를 이어가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받고 있어요.”
가죽을 씌우는 마네킹은 살아있던 개체의 모양과 크기에 알맞게 제작해야 한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마주하는 일
희귀한 직업인 만큼 편견 역시 이어졌다. 왜 그런 잔인하고 징그러운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었다. ‘동물에게 못할 짓’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여전히 주눅 든다는 윤지나 동문은 표본이 가진 역할과 가치를 알리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박제사가 될 후배들이 환영받는 분위기에서 일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신체 구석구석을 관찰할 때 인상적이었던 순간이 많아요. 호랑이의 무거운 팔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육중함에 감탄하고, 오랑우탄의 손을 잡았을 때는 그 주름과 감촉이 사람과 너무 비슷해 할아버지 손처럼 느껴져 한참을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은 죽은 동물의 몸에서 아직 온기가 느껴지기도 하고요. 죽음을 맞이한 동물이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인 끝에 제 손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정든 자식처럼 느껴지고 뿌듯함도 정말 커요. 또 제가 죽고 나서도 이 표본은 세상에 영원히 남을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지면서 더 잘 만들어야겠다는 책임감이 듭니다.”
캐나다 박제 챔피언 켄 워커와 함께 작업한 코요테 박제
최근 샴악어 박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윤지나 동문은 언젠가 신생대 멸종동물인 검치호랑이를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꿈꾸고 있다. 박제사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고라니, 담비, 삵, 수달 등 우리나라 토종동물의 마네킹을 3D 모델링으로 만드는 일도 계획하고 있다. 박제를 향한 그의 꿈과 열정은 새롭게 탄생한 그의 표본처럼 후대를 위해 지속될 것이다.
“많은 분들이 박제를 ‘죽음’과 연관 지으시는데 박제사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생명’을 보면서 작업합니다. 동물이 가진 생명력과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이를 완벽히 재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만든 표본이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실물의 기록이 돼 우리나라 후대 과학자들의 연구에 초석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표본을 만들고 보존하는 일에 많은 관심과 지원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