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첫 한국계 수학자가 탄생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와 한국 고등과학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허준이 교수는 대수기하학을 이용해 조합론 분야에서 다수의 난제를 해결하고, 대수기하학의 새 지평을 연 공로를 인정받아 필즈상을 수상했다. 수상 후 언론을 통해 그가 시인을 꿈꾸며 고등학교를 자퇴했던 일, 검정고시로 서울대 물리천문학과에 진학했던 특별한 일화도 소개됐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일은 아내 김나영 박사를 만난 것이다. 수학이라는 공통분모로 만나 가정을 이룬 두 사람과 수학의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다른 퍼즐 조각을 맞춰
완성하는 수학의 화학작용
허준이 교수 : 수학은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나 아무 제약 없이 연구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에요. 연필과 종이만 있어도, 그마저 없더라도 운동이나 산책을 하면서 생각할 수 있거든요. 인문학적인 성격이 굉장히 강한 학문인 동시에 협업을 중시해야 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연대와 협업을 강조하는 수학의 문화가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김나영 박사 : 그러고 보면 저도 대학원에 있을 때 동기들과 함께 문제를 풀었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은 목표를 가진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지 특별한 일 없이도 마음이 정말 편하고 즐거웠어요. 다른 사람보다 먼저 무언가를 발견해내거나 기존에 나온 연구를 반박하는 일보다는 난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쟁의식 없이 그 시절을 즐겼던 것 같아요.
허준이 교수 : 하나의 문제를 풀려면, 각자 다른 퍼즐 조각을 가진 수학자들이 어떤 그림을 완성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모두의 퍼즐 조각을 한 판에 쏟아 내고 들어맞는 경우가 있는지 계속 확인해 보는 거예요. 맞는 조각이 없으면 새로운 퍼즐 조각을 찾아야 할 때도 있고요. 목표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난제를 풀어야 하기에 수학자 간 ‘케미스트리(Chemistry)’가 무척 중요한 것 같아요. 또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수학의 이론과 명제는 다른 학문과 달리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더라도 깨지거나 사라지지 않죠. 제가 연구하는 조합론은 생물학에서의 박테리아처럼 가장 원초적인 형태를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순열과 조합, 집합의 분할 같은 유한 집합 사이에 유한한 관계를 다루는 데 그 성격에 비해 비교적 신생학문이라고 할 수 있죠.
김나영 박사 : 제가 전공한 정수론은 조합론에 비해 굉장히 오랫동안 연구돼 온 학문이에요. 정수론의 토대인 정수 체계는 수학의 가장 중심적인 영역이자 인간이 연구하는 수학적 관념의 시작점입니다. 워낙 역사가 길다 보니 기존에 전개된 이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새로운 결과를 내기까지 십수 년이 걸리기도 하죠. 이 때문에 정수론에서 새로운 결과를 내는 것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쌓아온 학문에 벽돌 한 장을 더 올려놓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결과만 보면 어린아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굉장히 복잡하고 심도가 깊어요.
뜻밖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몰입 속 빈칸
김나영 박사 : 가끔 허준이 교수가 굉장히 설레고 흥분한 모습으로 ‘뭔가 푼 것 같아’라고 말할 때가 있어요. 앞서 이야기한 어려운 퍼즐 조각 하나를 맞췄을 때 보이는 반응이죠. 그러고나면 마음을 차분히 다잡고 문제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요. 수학은 단 하나만 틀려도 결과가 성립할 수 없어 실수 없이 차분하게 차곡차곡 쌓아가야 하거든요. 이 과정이 정말 고통스러운 걸 저도 아니까 안타깝기도 해요.
허준이 교수 : 문제에 담긴 모든 가능성을 활짝 연 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그게 직관으로 발전해요. 사실 직관은 자기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고, 알더라도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말할 수 없어요.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죠. 그런데 수학은 그 과정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학문이에요. 가령 과학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지만, 수학은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양의 정보를 갖고 있어요.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가 오늘 갑자기 풀리고 그 원리를 깨닫게 되는데 이는 새로운 정보나 달라진 환경으로 이뤄진 것이 아닌, 어제와 똑같은 내가 만들어 낸 결과이자 우연히 일어난 변화예요.
2008년 서울대는 ‘노벨상프로젝트’ 일환으로 히로나카 헤이스케 하버드 명예교수를 교수로 임용했고, 그와의 인연은 허준이 교수를 수학의 길로 이끌었다.
김나영 박사 : 허준이 교수가 뛰어난 성취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특유의 자유로움 때문인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자유롭게 놀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게 일상이었고, 덕분에 기존 틀에 얽매이거나 한계를 두지 않게 된 거죠. 그러고 보면 수학은 허준이 교수의 모습처럼 자유로움을 학습하는 일인 것 같아요. 논리가 맞아야 한다는 규칙은 있지만 규칙의 엄격함 때문에 그 외의 모든 것들이 자유롭죠. 어떤 대상을 연구할 것인지,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야 하는지 정해진 규칙이 없어요.
2022년 국제수학자대회에서 한국계 최초로 수학계 최고의 영예인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
8월 29일 열린 학위수여식에서 전한 그의 축사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줬다.
허준이 교수 : 맞아요. 그런 자유로움 속에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방법과 수많은 조합을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두뇌에서 ‘랜덤 커넥션(Random Connection)’이 일어나요. 결정적인 연결을 통해 사실을 인식하고 이미 내가 알고 있다는 걸 깨닫는 게 참 신기하죠. 저는 수학의 난제는 물론 세상의 본질적인 진보는 수학 문제를 푸는 과정처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과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려면 일상에 빈칸을 많이 두어야 하죠. 여기서 빈칸은 단순히 놀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휴식을 충분히 취하는 거예요. 의식하지 않는 곳에서 여러 가지 시도를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 두는 거죠. 그러다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었을때 책상에 앉아 연필을 붙잡아도 늦지 않아요. 몰입을 위해서는 의식적인 움직임도 필요하지만 내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넓은 빈칸을 두고 그 안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는 것도 중요합니다.
친구이자 멘토인
나의 동반자
김나영 박사 : 허준이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수학과 석사 과정 때였어요. 동기들끼리 사이가 정말 좋았는데 같이 수업 듣고, 밥 먹고, 과제 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함께 시간을 보냈죠. 전공 분야가 달라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일도 많았고요. 돌이켜 보면 예전부터 무언가를 꼭 이뤄낼 것 같다고 생각 했기에 남편의 필즈상 수상 소식이 크게 놀랍진 않았어요. 특히 미국 유학 시절, 오랫동안 연구해 온 분들도 풀지 못했던 리드 추측(Read’s conjecture)을 허준이 교수가 박사 과정 1학년 때 푸는 모습을 봤을 때, 같은 수학자로서 정말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죠.
허준이 교수 : 아내에게 평소 잘 못 듣는 칭찬을 오늘 많이 듣네요. (웃음) 김나영 박사를 만났던 대학원 석사 시절은 제가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좋은 사람들과 스승님을 만났고, 특히 지금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된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하고요. 제가 하는 일을 아내가 잘 이해해 주고 도와줘서 고마워요.
김나영 박사 : 같은 수학자로서 수학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함께 머리를 맞대야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 수학 문제처럼 앞으로도 서로에게 좋은 친구이자 멘토로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허준이 교수 : 저의 잠재력과 가치를 알아주고 이를 끌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내처럼 학생들에게 저도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인터뷰를 하다 보면, 청년들을 위한 조언을 해달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답변 드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떤 조언을 해도 시각에 따라서는 옳고 그른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8월에 있었던 학위수여식 때 그런 고민을 담아 축사를 전했어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저도 수학자로서 연구자로서 묵묵히 그 시간을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