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노트 2
통섭의 길에서 찾는 화합의 미래
미래를 여는 한국 고대사
미래를 여는 한국 고대사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의학과 법의학, 체질인류학 등 자연과학과 융합한 고대사 연구가 이뤄지면서 고대사회의 세밀하고 깊숙한 부분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다양한 이웃들과 함께 교섭하며 생활한 고대인의 일상은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을 앞둔 우리에게 연대와 화합의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글. 권오영 국사학과 교수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진행되는 유적 발굴조사는 매년 2,000건에 육박한다. 그중에는 중세와 근대 유적도 일부 포함돼 있으나, 대다수는 선사와 고대에 해당된다. 고대사 관련 발굴조사를 어림잡아 매년 1,000건이라고 치고,1건당 새로운 사실이 10개씩만 발견됐다고 하면 해마다 고대사 관련 신정보가 10,000건씩 제공되는 셈이다. 10년이면 100,000건으로 이 정도의 양이면 한국 고대사 연구는 진작 새로운 차원에 돌입하였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자료를 발굴하고 생산하는 고고학자인가? 발굴된 자료를 가공해 사료로 활용하지 못한 역사학자인가? 어차피 고대사 연구에서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는 협업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서로 칸막이를 친 상태에서 가끔 협업하는 정도였지만, 이제 양자 사이의 장벽은 거의 허물어진 상태이다. 특히 고고학 자료를 활용하지 않고 고대사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가 됐다.
수백 년 이상 지하에 매몰돼 있다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유물은 대부분 염분이나 습기로 인해 병든 상태이다.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유물에는 보존과학자가 필요하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보존과학자는 매우 소수였으며, 탈염처리나 부식 방지 같은 소극적인 업무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보존과학자들의 역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손톱 만한 양의 목탄만 있으면 지금으로부터 몇천 년 전의 것인지 밝힐 수 있고 나무토막에 남아 있는 나이테를 분석해 벌채 시점을 추정할 수 있다. 작은 토기편을 깨지 않고 미량원소의 구성비를 분석해 생산지를 추정하는 작업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의료분야에서 개발된 X-Ray, MRI나 CT 촬영의 원리를 도입해 유물을 파손하지 않고 내부의 물리적 상태나 화학 구성을 밝히는 기술도 급속히 발전했다. 비파괴 분석이 가능해지자 분석 대상이 되는 유물의 종류와 건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개복하여 수술하는 외과 의사를 고고학자에 비유한다면, 의공학은 보존과학에 해당될 것이다.
이제는 인골에 축적된 특정 원소의 비율을 통해 어떤 식재료를 주식으로 삼았는지, 어느 지역에 살았는지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토목공학자의 도움을 받으면 서울의 풍납토성이나 경주 월성과 같은 기념비적인 거대 구조물을 만드는 데에 동원된 기술을 규명하고, 소요된 총 인력과 재원까지 추산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방면에서 과학자들의 활약이 이어지면서 고고학과 역사학 연구 방법론은 크게 요동치고 있다.
고고학 자료를 활용하고,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해 새롭게 얻은 정보는 고대사회의 세밀하고 깊숙한 부분까지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고대인들의 의식주, 위생과 병리, 생산과 유통, 전통 기술 등 새로운 연구 주제가 등장한다. 위대한 왕의 정복사업이나 사건의 발생 순서, 각종 제도를 암기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령인 것처럼 생각하던 과거의 인식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단일민족이면서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한민족이 미개한 주변 집단들을 정복하고 통치한 것이 한국 고대사의 본령이라는 희망(?)도 접어야 한다. 태초에 한민족이 존재해 한국사가 전개된 것이 아니라, 역사 발전의 산물로 현재의 우리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의 이웃에 대한 고정관념도 바뀌게 된다. 다가오는 다문화사회는 처음 겪는 일이 아니라 이미 고대사회에도 존재했다. 고구려 국가 내부에는 소그드, 거란, 말갈 등 다양한 이종족 집단이 존재했다. 고구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몽골고원의 돌궐과 연대했고,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사신을 보냈다. 백제는 바닷길을 통해 획득한 동남아시아의 특산품과 노예를 일본에 판매했다. 신라는 지중해와 서아시아에서 생산된 희귀한 물건을 입수해 경주의 왕릉에 넣었다. 영산강 유역의 주민들과 남해안의 가야인들은 바다 건너 일본 각지에 정착했고, 반대로 일본열도의 왜인들이 한반도 남부에 무리를 지어 사는 일도 있었다.
이렇듯 고대의 국경 개념은 지금과 달랐고, 고대인의 활동 범위는 우리의 예상을 넘어섰다. 앞으로의 한국 고대사 연구는 ‘한민족의 우수성’을 입증하려는 시대착오적 목표를 버리고, 유라시아를 무대로 다양한 이웃들과 교섭하면서 한민족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복원해야 한다. 고고학 자료의 활용, 과학기술과의 융복합, 열린 자세로 유라시아를 조망하는 넓은 시각. 이 세 가지가 한국 고대사 연구의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