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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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진료실 문턱을 넘은
자조(自助)와 돌봄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추혜인, 유여원, 박인필 동문
사회적 약자를 위한 세상, 모든 사람의 삶과 죽음이 똑같이 존엄할 수 있는 세상, 나를 스스로 돌보고 이웃을 함께 돌볼 수 있는 세상. 도움을 주고 도움받는 게 당연한 사회를 꿈꾸던 세 여자는 진료실 문턱을 넘어 환자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 꿈이 현실이 되길 바라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서울 은평구 주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추혜인(의학과 03학번) , 유여원(철학과 01학번), 박인필(치의학과 03학번) 동문을 만났다.
누구나 돌봄을
주고받는 병원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은 믿을 수 있는 의료기관, 구성원이 서로 돌보는 공동체를 꿈꾸며 의료진과 지역주민이 힘을 합해 만든 협동조합이다. 2012년 조합원 348명, 출자금 3,200만 원으로 시작한 살림은 2022년 3월 기준 조합원 3,721명, 출자금 25억 원을 보유한 탄탄한 의료협동조합으로 거듭났다. 그 출발은 사회 소수자를 위한 의사가 되고 싶었던 추혜인 동문에게서 시작됐다. 건축가를 꿈꾸며 토목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중 피해자들을 위한 의료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마주했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피해를 증언해 줄 의사가 필요하다’라는 말에 의대에 진학했지만, 의예과에 다니던 2000년 의약분업으로 국민과 의사 간 신뢰가 무너지는 상황을 목격했다. 누구나 돌봄을 주고받는 병원, 환자와 의사가 서로 신뢰하며 지역주민과 호흡하는 병원,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병원을 만들고 싶었다. 이 꿈에 대학 시절부터 함께 여성주의를 이야기하던 두 사람이 합류했다. 살림 경영고문 유여원 동문과 살림치과 원장 박인필 동문이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신기하게도 저희 모두 각각 다른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며 의료협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에 공감하고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는 사회적 약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거든요. 이를 병원에 도입한다면 환자와 의사가 평등하게 서로 존중하고, 단순히 의료 서비스의 소비자나 판매자가 아니라 서로돌 보고 돌봄을 받는 ‘마을 공동체 속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추혜인
동등한 관계에서 지키는
나의 건강
살림의 모든 조합원은 출자액이나 가입 시기에 관계없이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조합원 투표로 선출된 대의원이 총회를 열어 이사와 임원을 선출하고 사업계획을 승인한다. 의료기기 구입부터 예방주사비 할인가까지 병원의 모든 일을 조합원들과 함께 결정한다. 진료실에서도 의료진은 환자, 즉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경청한 뒤 건강에 해로운 생활습관은 없는지, 불필요하거나 중복된 투약은 없는지 꼼꼼히 살핀다. 이 같은 충분한 토론은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게 돕고 두터운 신뢰 관계를 만들어준다.
“병원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경험은 환자에게 건강에 대한 강력한 동기 부여를 제공합니다. 자기 의견 없이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수동적으로 진료받으면 그저 의사가 이야기한 것 중 내가 원하는 말, 듣고 싶은 말만 듣게 되잖아요. 또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다 보니 제대로 된 진료를 받을 수 없고 그런 불신이 쌓여 다른 병원을 찾는 ‘의료 쇼핑’이 반복되는 것이죠.” - 유여원
“의사도 환자가 나를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만에 하나 생길 문제가 걱정돼 방어적으로 진료하게 될 수 있어요. 또 환자는 민감한 정보를 의사에게 얘기하기를 꺼리게 되고 그 결과 의사는 환자의 증상을 최대한 세밀하게 알아내 최소한의 검사를 시행해야 함에도 더 많은 검사를 하고 방어적인 치료 계획을 세우게 되죠.” - 박인필
“살림의원 개원 초기에 환자분들이 ‘약이 잘 안 듣는다’, ‘나한테 맞지 않는 치료법 같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셔서 놀랐어요. 다른 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한 번도 못 들어본 이야기였거든요. ‘동네 병원이라 못 믿나?’라는 생각도 했죠. 그런데 그 환자분이“나는 여기가 내 주치의 병원이자 평생 올 병원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꼭 해야 한다. 다시 안 올 병원이면 서로 불편한 이야기 꺼내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서로 불편한 이야기도 나눌 만큼 신뢰할 수 있는 병원이 의료협동조합이자 의료기관으로서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 추혜인
은평구에 뿌리내린
공동체의 가치
살림은 올해 창립 10년 차를 맞이했다. 가정의학과 전문 병원으로 개원한 살림의원은 부인과, 정신의학과로 진료 범위를 확대했고 살림치과, 살림한의원, 살림재택의료센터, 살림데이케어센터 등 다양한 의료복지 돌봄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탄탄한 의료협동조합으로 거듭났지만, 주민과 지역사회 건강을 위한 살림의 실험과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돌봄과 재활이 필요한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주택, ‘케어B&B(Care Bed and Breakfast, 돌봄 숙박)’를 시범 사업으로 운영했어요. 우리나라는 건강보험이 잘되 어 있지만, 혼자 사는 청장년이 암에 걸리거나 사고로 재활치료를 하려면 돌봐줄 시설과 서비스가 부족합니다. 실제로 방치되어 후유장해가 남는 분들도 계시죠. 그런 공공의 영역이 할 수 없는 부분을 우리가 챙기고 이를 제도화되도록 만들고 싶어요.” - 유여원
모든 사람의 삶과 죽음이 평등하길 바라던 세 사람의 마음은 지난 10년간 은평구에 뿌리내려 많은 변화를 이끌었다. 연대의 가치를 믿는 조합원들, 지칠 때마다 힘이 되어준 서로가 있었기에 지금의 살림을 만들 수 있었다는 세 사람. ‘안심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을 만들고 그 마을을 지탱하는 한 축’이 되길 바라는 살림의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학생들이라면, 대부분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전공을 선택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의료협동조합은 누군가를 돌보는 보람찬 일인 동시에 자신의 영향력을 공동체와 사회가 유익해지도록 만드는 데 사용할 수있 어요.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 박인필
“보건의료인을 꿈꾸는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에 있는 많은 사람과 만남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과정 자체가 진료할 때도 큰 자양분이 됩니다. 사회에 나가서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협력하고 타인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 추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