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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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청중의 생각을 자극하는
새로운 선율
전예은 작곡가
19세기 말, 전쟁 이후의 대격변 속에서 많은 작곡가들은 기존 조성음악에서 벗어나 불규칙하고 파괴된 세계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이에 따라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의 음악이 등장한 한편, 작곡가의 설명 없이는 이해할 수 없게 되며 청중과의 괴리를 낳았다. 전예은 작곡가의 꿈은 ‘난해하고 복잡하다’는 현대음악의 고정관념을 바꾸는 것이다. 연주자와 청중, 그리고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음악, 창작자의 뜻을 상상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전예은 작곡가(작곡과 04학번)를 만났다.
현재를 사는
우리 모습을 표현한 음악
공사장의 망치 소리가 현악기 선율과 어울린 뒤, 종소리를 시작으로 오보에의 몽환적인 멜로디가 들려온다. 출퇴근마다 타는 지하철, 매일 오가는 번잡한 빌딩 숲에서 들리던 무의미한 소리들이 다양한 악기의 음색과 패턴을 입고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한다. 전예은 작곡가의 2017년 작품 ‘도시교향곡(Urban Symphony)’이다. 그는 이처럼 우리 주변의 일상적이지만 스쳐 가는 소리들, 현재를 사는 우리 모습을 음악 속에 담는다. 현대인이 느끼는 보편적인 정서를 녹여냈기에 난해한 현대음악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가진 이도 공감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음악을 무척 좋아해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 늘 클래식이나 팝송이 흘렀어요. 저도 자연스럽게 흥미가 생겨 피아노, 바이올린, 플롯, 국악기까지 여러 악기를 배웠죠.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전문 연주자의 길도 생각했었지만, 입시를 위해 악기를 연습하니 금세 지루해졌어요. ‘나는 이미 작곡된 음악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직접 음악을 창작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고등학교 시절 그가 가장 관심 가진 분야는 영화 음악이었다. ‘올드보이’, ‘장화, 홍련’, ‘태극기 휘날리며’ 등 한국 영화만큼 영화 음악도 주목받던 때였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영화 음악을 향한 관심은 이어졌지만 작곡을 공부할수록 영상을 보조하는 수단으로서의 음악이 아닌, 음악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작곡가로서 하고자 하는 음악의 방향성을 탐구하고 싶었던 그는 졸업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사실 그때도 현대음악 작곡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 듣기 어렵고 생소한 음악이 아닌,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이해하기 쉬운 음악을 만들고 싶었죠. 석사 졸업을 앞두고 처음으로 제 음악으로만 구성된 45분가량의 음악회를 졸업 연주회 때 선보였는데 그때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알게 됐어요. 작곡가로서의 제 색깔도 그때 만들어진 것 같아요.”
음악극 속에 담긴
인간의 본성
미국 이스트만 음대(Eastman School of Music)와 인디애나 음대(indiana university jacobs school of music)에서 작곡 전공 석·박사를 졸업한 그는 Bernard Rodgers 작곡상(2010), ASCAP 미국 저작권협회 모튼 굴드 젊은 작곡가상(2013), Georgina Joshi 작곡상(2014) 등을 수상하고 인디애나 뉴뮤직 앙상블, 뮤지카노바 앙상블 등 국내외 유수 단체와 작품을 연주하며 주목받았다. 2017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현대음악 시리즈 ‘아르스 노바(Ars Nova)’에서 위촉 작품 ‘도시교향곡’을 초연한 전예은 작곡가는 같은 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 아카데미 프로그램에 참여해 만든 20분 분량의 첫 오페라, ‘빨간 구두’를 초연했다. ‘빨간 구두’는 2020년 국립오페라단의 제안으로 90분 장편 ‘레드 슈즈’로 다시 태어났다.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의 미스터리한 내용과 환상적인 분위기를 담은 ‘레드 슈즈’는 그의 다른 작품처럼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들이 녹아 있다.
“『빨간 구두』는 욕망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동화지만, 한편으로는 규범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잔인하게 핍박하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빨간 구두를 신었다는 이유만으로 소녀를 비난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지 않고 획일화된 틀 안에 가두려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사회 모습과도 닮아있죠.”
‘레드 슈즈’ 작업으로 처음 장편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그는 “연출가와 지휘자, 연주자 등 많은 사람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전했다. 이는 지난해 선보인 ‘서정오페라, 브람스’에서도 이어졌다. 낭만주의 대표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귀에 익숙한 브람스의 음악을 편곡한 곡들과 브람스가 한평생 사랑했던 클라라와 주고받은 편지를 바탕으로 창작한 곡들로 채워졌다. ‘서정오페라, 브람스’는 초연 이후 제주, 하남, 음성,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공연됐다.
“‘레드 슈즈’가 제 의도와 스타일이 많이 반영된 작품이라면 ‘브람스’는 처음부터 연출자와 함께 작업하며 전체 극에서 작곡가 브람스의 이야기가 잘 전달되고, 음악적으로 잘 표현될 방법을 고민했어요. 대본과 음악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기까지 많은 사람과 수없이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이 무척 뜻 깊고 행복해요.”
영감의 원천이 된
수많은 경험들
대학 시절, 자신만의 음악적 방향성을 알기 위해 영감을 찾아 다녔던 전예은 작곡가에게 서울대는 지금의 그를 만든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학교에서의 수많은 만남과 경험이 고스란히 창작을 위한 씨앗이 된 것이다. 그는 “하나하나 해 나가는 경험들이 내가 정말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줄 것”이라며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전했다.
“신입생 때 ‘SNUPO’라고 ‘서울대학교아마추어오케스트라’ 동아리 활동을 했었어요. 기악 전공자가 아닌 학생들이 모인 오케스트라인데 음악에 대한 열정은 음대생들 못지않았죠. 모이기만 하면 음악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과연 저들만큼 음악을 온전히 즐기고 있을까?’, ‘저렇게 열정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졌고 이후에 더 열심히 공부한 것 같아요. 음악뿐 아니라 심리학이나 프랑스 문학처럼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야의 수업은 모두 들었어요. 학교에서의 그런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지난 5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첫 상주 작곡가로 임명된 그는 오는 11월 위촉 작곡한 ‘장난감 교향곡, Toy Symphony’ 초연을 앞두고 있다. ‘청중이 흥미롭게 들을 수 있는 현대음악’을 꿈꾸며 최선을 다해온 전예은 작곡가는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활동하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무슨 일이든 기회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단편 오페라 ‘빨간 구두’의 작업을 시작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니까요. 늘 이 마음을 갖고 창작자로서 좋은 작품 보여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