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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발자취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

나눔과 배려의 정신

故 고윤석 명예교수




 

2022년 1월 4일, 한국 물리학계 역사인 고윤석 자연과학대학 명예교수가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60~1970년대 우리나라의 현대 물리학이 자리 잡는 과정에 크게 공헌했던 고인은 제자 사랑이 유독 남달라 2021년 12월 7일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에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나란히 딴 ‘고윤석·박종숙 장학기금’ 등 약 13억 원을 쾌척했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전한 故 고윤석 명예교수의 삶을 조명해 본다.



한국 물리학의 초석을 세우다


1927년 1월 13일,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서 태어난 고윤석 명예교수는 1945년 경성제국대 예과에 이어 1947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물리보다 수학을 더 좋아했지만, 국내 과학기술과 공업 기술이 낙후돼 있던 상황에서 기초과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물리학과 진학을 결정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시점에 6·25전쟁이 터졌고 피란을 가지 못해 숨어지내다 결핵을 앓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한 1953년, 잠시 전남대학교 강단에도 섰지만 전쟁 직후였던 당시 체계적인 물리학 연구는 불가능했다.


한계를 느꼈던 때 고윤석 명예교수는 미국 국무부가 운영하는 유학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에 한국을 떠나 네브래스카대학교 링컨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물리학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원자핵에 관심이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직후, 원자폭탄을 평화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류의 에너지원으로 만드는 것은 모든 물리학자의 꿈이기도 했다. 먼 타국에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공부를 이어간 그는 당시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이론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조교수가 됐다. 그러나 이듬해 미국의 안정된 생활 대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 당시 미국에서 그의 월급은 1,200달러로 한국에서 받는 임금의 15배였다.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의 배경에는 후배들이 있었다. 고윤석 명예교수는 생전 인터뷰에서 “돈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을 후배들 걱정에 다시 서울대로 돌아오게 되었다”라고 전했다. 귀국 후 마주한 상황은 그의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자신이 떠날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현실에 그는 학부체제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고, 학생들이 더 큰 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유학을 도왔다. 이렇게 1964년 모교인 서울대 물리학과와 인연을 맺은 그는 1992년 명예교수로 퇴직할 때까지 서울대에 봉직했다. 1983년에는 서울대 부총장을 지냈다. 고인은 『아이작뉴턴』(1970), 『자연과학개론』(1972), 『현대물리』(199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집필했고, 대한민국과학기술상(1990), 국민훈장 목련장(1992) 등을 수상했다.



나눔으로 돌아온 제자들을 향한 애정


30여 년간 우리나라 물리학 발전을 위해 공헌한 고윤석 명예교수는 과학계 후진 양성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중에서도 핵물리학 분야의 인재 양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핵물리학상을 직접 제정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2016년 제정된 ‘보산 핵물리학상’은 매년 핵물리학을 전공한 젊은 연구자 가운데 연구 업적이 탁월하고 국내 핵물리학 발전에 기여할 인물을 선정해 상금과 상패를 수여한다. 그는 “작은 상이지만 우리나라가 기초과학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라며 제정 이유를 밝혔다.


고인의 제자 사랑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이어졌다. 2021년 12월 7일 그는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나란히 딴 고윤석·박종숙 장학기금 등 약 13억 원을 쾌척했다.자연과학대학이 기초과학을 연구하고,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길 바라는 마음은 그가 처음 서울대와 인연을 맺었던 순간 그대로였다. 2022년 1월 4일, 영면한 고윤석 명예교수의 나눔과 배려의 정신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