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Cover story
대화의 길
SNU inside
News & Events
Home
Cover story
대화의 길
SNU inside
News & Events
닫기
대화의 길 
X
동문 2

미래를 위한 대를 이은

나눔의 정신

KCC정보통신 이주용 회장

▶영상보기 




 
2017년 열린 KCC정보통신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이주용 회장은 600억 원 상당의 개인 재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지난해 12월, 그는 모교인 서울대에 ‘이주용·최기주 문화관 리모델링 기금’ 100억 원을 쾌척하며 그 약속에 마침표를 찍었다. 세상을 놀라게 한 결정이었지만, “기부가 집안의 문화가 됐다”라는 담담한 소감뿐이었다. 한국의 정보화 혁명을 이끄는 동시에 대를 이어 사회공헌 앞장선 KCC정보통신 이주용 회장에게 ‘나눔’의 의미를 물었다.


사명감과 절박함, 
IT 산업의 포문을 열다

1953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해 2학년을 마친 이주용 회장은 경제학을 배우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인생과 한국의 미래를 바꿀 두 가지 선택을 한다. 첫 번째는 컴퓨터란 단어조차 생소하던 196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IBM사에 입사한 일이다. 경제학을 배우기 위해 떠난 유학길에서 컴퓨터 세계에 발을 들인 그는 높은 연봉의 글로벌 은행을 뒤로한 채 IBM에 입사했다. 그리고 6년 뒤, 한국의 1인당 GNP가 그의 연봉 100분의 1도 되지 않던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결정 뒤에는 조국의 IT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사명감과 절박함이 있었다.

이후 이주용 회장은 대한민국 IT 산업의 역사와 발걸음을 같이 했다. 1967년 국내 최초의 컴퓨터 파콤222를 들여와 컴퓨터 인력을 길러냈고, 1975년 한국 최초의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을 이끌었다. 1981년에는 철도 승차권을 온라인으로 전산화하는 작업을 맡았고, 이때 개발된 소프트웨어는 1991년 태국 철도청으로도 수출됐다. 한국 최초의 소프트웨어 수출이었다.

“살아오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안전한 길이 답은 아니라는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고 그게 무엇인지 찾는 게 인생이기도 합니다. IT 불모지인 한국에 컴퓨터를 도입하겠다는 말에 모두들 냉소적이었어요. 컴퓨터를 통해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선친에게 배운 
나눔의 가치

이주용 회장은 그동안 KCC정보통신의 미래와소프트웨어재단, 종하장학재단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왔다. 이 같은 결정에는 선친인 이종하 선생의 가르침이 컸다. 울산에서 ‘천석꾼’으로 불렸던 故 이종하 선생은 전쟁 고아들을 위한 장학금 지원에 앞장섰고 1977년, 당시로선 울산 유일의 실내종합체육관이었던 ‘종하체육관’을 지어 기부했다. 지역의 커뮤니티 장소로 제 역할을 다한 종하체육관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이주용 회장이 설계와 건설비용 전액을 부담하기로 결정하며 지난해 11월 재건립이 확정됐다.

“학교 다닐 때, 집 근처에 400명 넘게 수용하던 큰 고아원이 있었어요. 그 아이들 모두 다닐 수 있는 학교가 필요했는데 선친께서 당신이 기성 회장으로 있는 강남국민학교(현 강남초등학교) 교실을 더 지어야겠다며 도와줄 수 없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영어를 잘해 미군 부대를 오가며 통역 일을 돕고 있었어요. 미 공군사령부에 찾아가 중장비와 자재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고, 모두가 도와준 덕분에 무사히 학교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뿌듯함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아버지 덕분에 남을 돕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일을 함께했을 때 어떤 기분인지 느낄 수 있었지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주용 회장은 평소 근검절약을 강조한 아버지 때문에 늘 헌 옷만 입고 다녔다. 학교에서 소지품 검사를 할 때마다 교복 주머니에선 못, 단추, 머리핀이 나와 어릴 적 별명도 ‘고물’이었다. 물자가 귀했던 6.25 전쟁 당시 그는 길 가면서 주워 담은 온갖 잡동사니를 챙겼고 자라는 몸을 감안해 산 신발과 교복도 늘 헐렁했다. 미국 유학 후 한국에서 회사를 창업하고도 새 차를 산 적이 없었다. 한번 산 중고차를 10년씩 타고 다녔고 아들인 이상현 부회장이 수입차 사업을 시작한 2012년에야 새 차를 타봤다. 그가 76세 때였다.

“아버지는 늘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힘들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돈을 제대로 사용하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아요. 같은 돈이더라도 그것을 훌륭하게,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가치 있게 쓰는 것이야말로 돈을 제대로 쓰는 것이지요.”






꿈과 재능을 찾는 
문화관으로 거듭나길

이주용 회장은 2016년 서울대병원 발전을 위해 10억 원을 기부한 데 이어 2017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 ‘이주용 정보문화학 기금교수기금’ 10억 원을 쾌척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서울대 문화관 리모델링 기금 100억 원 기부를 약정하며 600억 원을 기부하겠다던 4년 전 약속을 지켰다. 이 기금은 미디어아트, 무대, 전시 등 다양한 문화활동을 펼칠 수 있는 새 문화관 내 공연장 ‘블랙박스’ 공간을 건립하는데 사용될 계획이다. 또한 창업과 교육, 문화 복합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울산 종하이노베이션센터(전 종하체육관)와 콘텐츠 교류도 계획 중이다. 서울대는 이곳을 이주용 회장의 호를 딴 ‘운당홀’로 명명했다.

“경영과 과학 분야에 많은 지원이 이어지는 것에 비해 인문, 문화 교육이 쉽지 않은데 새 문화관이 건립되면 여러 분야를 융합해 학생들을 지원해 주길 바랍니다. 또 하드웨어 만큼 소프트웨어가 풍성한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두가 함께 생각을 공유할 콘텐츠나 프로그램을 개발해 활기찬 공간으로 만들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재산 절반을 사회에 기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이주용 회장은 “가족 중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라면서 “모두가 격려해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전했다. 집안에서 작은 동문회를 열 수 있을 만큼 서울대와 인연이 깊은 이주용 회장 가족은 장남 KCC 이상현 부회장(전자공학 85)을 비롯해 첫째 딸과 두 사위 모두 서울대를 졸업했고, 현재 손녀사위는 서울대 대학원에, 두 손녀 역시 서울대에 재학 중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이상현 부회장은 “가족의 모교인 서울대에 좋은 기회로 기부하게 돼 기쁘다”라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앞으로도 사회공헌을 이어갈 계획이다”라고 전했다. ‘어렵게 번 돈은 의미 있는 곳에 과감하게 쓰고, 부는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사회를 위해 환원하는 것’이라는 이주용 회장의 신념은 사회 곳곳에서 그 가치를 반짝이고 있다.

“새로운 서울대 문화관이 우리나라 문화예술 발전의 거점이자 세계 유수 대학과 나란히 할 수 있는 핵심적 기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그곳에서 학생들이 자기가 진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꿈과 재능을 찾고, 사회에 보답할 방법을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