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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속에 담는

삶과 순환의 무한한 이야기

서양화과 02학번 애니메이션 감독 에릭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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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영화 <미나리>가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는 낭보가 전해진 날, 또 하나의 경사스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에릭 오 감독의 작품 <오페라, Opera>가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Best Animated Short Film)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것.
그동안 특유의 개성과 남다른 시선으로 우리 주변의 사회문제를 녹여낸 에릭 오 감독은 작품 속에 담긴 자신의 철학이 서울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구축되었다고 전했다.


학교에서 찾은 진정한 나의 목소리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사랑했던 에릭 오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애니메이터를 꿈꿨다. 지금처럼 정보를 얻기 쉽지 않았던 때, 그는 단순히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에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에 지원했다.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선 예술 전반의 기본이 되는 순수미술을 탄탄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올바른 결정이었어요. 서울대 서양화과는 어떻게 보면 철학과에 가까웠거든요. 그림의 표현기법이나 기술도 배우지만,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작품 속에 어떤 주제의식을 담고 싶은지, 나는 누구인지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만들어 주었죠. 수업이 끝나면 매일 야작한다는 핑계로 실기실에 남아 동기들과 맥주를 마시며 철학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나요. 지금 돌아보면 웃기기도 하고 철없기도 한데, 그 과정에서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고민하게 됐어요.”

스스로를 향한 그의 질문은 대학교 3학년 2학기 무렵, ‘반드시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어야겠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었던 그에게 애니메이션만큼 좋은 매체는 없었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것을 배울 수업이 없어 독학으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며 경험했던 것들, 경험 안에서 갖게 된 그의 생각은 작품 안에 오롯이 담겼다.

“학교에서 유화 추상화를 많이 그렸어요. 다른 작품들과 섞여 있어도 바로 제 것이라고 알 만큼 제 색깔이 묻어나왔죠. 그게 지금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이어지는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제 작품 속에는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가 있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게 학교에 다니는 동안 만들어진 개성인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는 기술적인 면도 능수능란
해졌지만, 작품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된 것이죠.”


땅에 떨어진 붉은 하트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Heart> 속등장인물들의 모습. 마지막 장면이 첫 장면과 이어지며 비극적인 일이 또다시 반복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자유분방한 작품에 담긴 세상을 향한 진심

일정한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 작가가 가진 생각을 자유분방하게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은 단편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가 전 세계 애니메이터들이 꿈꾸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퇴사한 이유 역시 이 때문이었다.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픽사에 입사한 에릭 오 감독은 <도리를 찾아서, 2016>, <인사이드 아웃, 2015>, <몬스터 대학교, 2013> 등에 참여했다. 픽사에 있는 동안에도 개인 작업은 계속됐다. 픽사를 퇴사한 후 그는 자신의 5분짜리 단편을 TV 시리즈로 만든 <피그: 더 댐키퍼 포엠>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시상식인 ‘안시’의 TV 시리즈 부문 최고상인 ‘크리스탈’을 수상했다.


픽사를 떠나 제작한 <피그: 더 댐키퍼 포엠즈>. 5분 분량의 에피소드 10편에는 댐을 지키는 어린 돼지와 친구 여우의 우정을 다룬다.


“회화와 영화에 모두 걸쳐있다는 점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영화 쪽으로 가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긴 호흡을 가진 애니메이션 영화가 되는 것이고, 회화 쪽으로 가까워지면 예술성 짙은 실험 영화가 될 수도 있어요. 어느 쪽에 가까워지느냐에 따라 다양한 표현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오페라>는 그에게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실험이자 도전이었다. 9분가량의 이 작품은 미디어아트 전시를 위해 처음 제작됐다. 끝없이 이어지는 낮과 밤 속에서 인물들은 묵묵히 맡은 일을 수행하며 하루를 보낸다. 언뜻 보면 그저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사라지길 거듭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저마다 사연으로 움직이고 있는 각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가 없으면 집단이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서로가 시계처럼 정교하게 맞물려있다. 인류 역사의 계층, 문화, 종교, 이념 간 갈등을 담아낸 이 작품은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올랐다.

“하루하루를 사는 것과 작품을 만드는 일이 정확히 일치돼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느끼는 모든 것이 작품 속에 담기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삶’과 ‘순환’을 계속 이야기하게 돼요. 초기작이었던 <Symphony>는 처음과 끝이 맞닿은 자아를 상상한 작품이고, <Heart>와 <Gunther>는 본능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였거든요. 작품을 통해 ‘우리는 어떤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걸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싶어요. <오페라>도 마찬가지예요. 점점 분열되고 있는 우리 주변의 모습, 서로를 파괴하고, 혐오하는 현실 속에서 인류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관객들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인류 역사의 계층, 문화, 종교, 이념 간 갈등을 나타낸 <오페라>는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 후보에 올랐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어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내기도 한 에릭 오 감독은 순수미술인 서양화과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대중을 위한 이야기를 만드는 픽사에서 스스로의 시선이 담긴 작품을 제작했다. ‘다수와 소수’,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틀을 깨고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그는 “후배들 역시 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너무 빠르게 바뀌는 세상 속에서 누구나 ‘낀 세대’라고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후배들 역시 내가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불안하고 막연한 마음도 들 거라 생각해요. 저는 그럴 때일수록 ‘내 목소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좋은 쪽으로 움직이려는 책임감을 갖고 나의 중심을 잡는 일. 그게 지금의 혼란한 시간을 견딜 시작인 것 같아요.”

최근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 <NAMOO, 나무>를 공개한 에릭 오 감독은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특별전을 통해 오랜만에 한국 관객들과 만났다. <나무>는 페이스북 오큘러스의 투자를 받아 가상현실(VR) 버전으로도 제작돼 화제를 모았다. 차기작에 대한 계획을 묻자,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에서 이어지고 있는 동양인 인종 차별에 대해 생각이 많다”라고 전했다. 처음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은 그때처럼 그는 여전히 우리가 함께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를 작품을 통해 함께 소통하길 바란다.

“<오페라> 이후 여러 기회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기쁘기도 하지만, 어깨도 무거워졌고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인지도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선보일지는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단편이 될 수도 있고, 시리즈가 될 수도 있겠죠. 다만 작품의 성공보다는 처음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던 그때처럼 끊임없이 고민하려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세상이 변해도 변치 않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나무>.
VR 버전으로도 제작돼 화제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