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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죽음으로부터 배운

현재를 사는 지혜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유성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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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게 1,500여 건의 부검을 진행한 유성호 교수는 늘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마주했다. 누군가의 악의로 인한 죽음, 스스로 선택한 죽음, 불의의 사고나 주변의 환경이 만들어낸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두렵고 멀게만 느껴진 죽음이 우리 곁에 함께한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 현재를 사는 지혜를 배우게 됐다. 망자(亡者)의 끝을 보며 삶을 더 사랑하게 된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에게 죽음의 의미를 물었다.

 
1.
죽음이라는 요소 때문인지 법의학은 철학과 법률이 더해진 인문학에 가까운 학문처럼 느껴집니다. 법의학은 어떤 학문인가요?
법의학은 법률에 관련한 의학지식을 연구하고 적용하는 학문입니다. 법률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의학적 지식은 ‘정확한 사망원인’으로 이를 밝히는 부검이 법의학자의 주 업무이죠. 법의학은 무엇보다 인권과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의학이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인 것 같아요. 저 역시 죽음의 원인을 밝혀 죄를 저지른 사람이 적절한 형벌을 받고, 죽은 자의 인권이 회복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법의학지침서는 세종 때 집필됐는데 그 책의 이름도 『무원록(無冤錄)』이에요. ‘원한이 없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조선 후기 법의학서인 『무원록』을 증보해 1792년에 간행한 법의학서 『증수무원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남해



2.
국내 법의학은 세계에서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자랑합니다. 그에 비해 법의학자 수는 매우 적은데 국내 법의학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과거에는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의사 수도 부족해 법의학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법의학을 선택했을 때도 국내 법의학자 수는 20여 명 정도였어요. 현재는 은퇴 후 활동하고 계신 분들까지 포함해 50여 명의 법의학자가 계십니다. 의대생들이 법의학 분야를 선택하기 어려운 것은 졸업 후 사실상 새로운 분야에 다시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임상의사보다 수익은 적은데 고생은 더 많이 해 어려운 선택일 수밖에 없어요. 국내 법의학자 분들 모두 이 같은 어려움을 이겨낼 만큼 소명의식을 갖고 계시기에 지금의 한국 법의학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3.
다양한 사연이 얽힌 죽음을 마주하시기에 죽음을 바라보는 눈이 특별하실 것 같습니다.
법의학자는 시신뿐 현장 상황과 미세 증거물 등 죽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합니다. 헤어지자는 연인을 100번 넘게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을 접할 때는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느끼고, 아이를 살리려다 꼭 끌어안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신을 볼 때는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숭고한지 생각하게 되죠. 죽음이란 같은 끝에 도달하는 삶이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삶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우리 곁에 늘 죽음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헛되지 않게 보내야겠다는 마음도 듭니다. 최근에 고독사한 사람들의 집을 청소하는 특수 청소부가 쓰신 에세이를 읽었어요.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인데 그분도 죽음이 있기에 삶이 소중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하고 있는 일은 다르더라도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현재의 삶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4.
늘 곁에 있는 죽음임에도 우리는 이에 대한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28만 명 정도 사망하는데 그중 대부분이 암이나 심혈관 질환 등으로 인한 병사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모습이 비슷해요. 치료를 받다 중환자실이나 요양병원, 또는 응급실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가 많은데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이 없다면 내가 아닌 의료진이나 자식들, 배우자에 의해 죽음의 모습이 결정되는 것이죠. 죽음은 분명 슬프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다면 미리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소중한 추억을 조금이나마 더 만들거나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방법이 되겠죠.



5.
정신적인 어려움도 많으실 텐데 이를 극복하시는 비결이 있나요?
역설적이지만, 죽음을 접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다잡는 것 같아요. 부검을 하기 전 본인 확인을 위해 반드시 고인의 신분증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 속에는 생에 가장 멋진 모습이 담겨있어요. 저희도 제일 신경 쓴 모습으로 증명사진을 찍잖아요. 아무리 시신이 손상돼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더라도 부검 후 정성스럽게 봉합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 드린다’는 생각을 합니다. 종교는 없지만, 나중에 다시 만나는 날 고마워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어요.



6.
많은 죽음을 접하시며 느끼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죽음에도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죽음을 앞둔 현실은 무척 냉혹합니다. 같은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그동안 어떻게 건강을 돌봤는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거든요.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를 살다 자신이 아픈 것조차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학대받는 어린이와 노인,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소외된 계층.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을 마주칠 때는 마음이 무척 아파요. 우리는 분명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발전을 이뤘지만 그만큼 주변에 대해 뒤돌아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앞만 볼 게 아니라 내 옆에 함께 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뒤처진 사람들은 없는지 살펴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법의학(法醫學, Forensics)은 법률상 문제 되는 의학적 사항을 연구하여 발표하고, 이를 해결함으로써 법 운영에 도움을 주고 인권옹호에 이바지하는 학문이다.



7.
좋은 죽음을 위해 교수님께서 실천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오래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에요. 100세 수명에서 90세부터 몸이 아프면 10년을 무척 고통스럽게 보내게 되잖아요. 그래서 일주일에 3~4회 꾸준히 수영을 하고 좋아하는 과자들을 먹지 않으며 신체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주변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들어가고 있어요. 톨스토이는 『인생론』에서 ‘나의 영원성을 보장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불로초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사랑으로 맺은 관계인 것이죠. 애니메이션 <코코>에서처럼 나를 사랑해준 사람, 내가 사랑한 사람과의 관계가 좋은 기억으로 거듭돼 이어지길 바라요.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서로서로 따뜻한 손을 잡아주고,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면서 완성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는 죽음을 초월해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와 서양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는 『인생론』에서 ‘인생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감정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8.
끝으로 치열한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현재에 충실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평소에 내가 했던 일을 반추하며 후회하곤 합니다. 저 역시 그랬어요.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란 생각에 얽매이다 보면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죠. 또는 너무 먼 미래를 미리 걱정할 때도 많아요. 지금 당장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지만 전망이 없을 것 같은 근심, 졸업 이후의 내 모습에 대한 막연한 걱정들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들이에요. 미국에서는 ‘졸업식’을 시작이란 뜻을 가진 ‘Commencement’라고 부릅니다. 우리 학생들도 이미 지나온 과거에 뒤돌아보지 말고, 먼 미래의 불확실성에 떨지 말고 현재를 살길 바랍니다. 그 순간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성숙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거라 확신합니다.